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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빠른 총알은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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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를 놓고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통장에 800원이 꽂힌다. 그는 12분 만에 점심을 해결하고 1주일에 71시간 일한다. 평균 나이는 44.9세지만 대개 젊은 친구이거나 지긋한 중년들이다. 그들이 왜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올해 택배기사 10명이 살기 위해 일하다 생을 마감했다. 알려진 것만 그렇다. 플라스틱 음식 그릇이 도로에 나뒹굴 때 세상을 원망하며 스러져간 청춘은 또 몇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택배기사의 잇따른 사망에 정부는 심야배송 금지 등 근로시간 제한에 집중된 대책을 내놨다. 이것은 흡사 전통시장 살리자고 대형마트 영업시간을 제한한 법을 떠올리게 한다. 원하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애꿎은 유통산업만 피폐해졌다는 주장은 흔하다. 이번 대책 역시 소비자 부담은 증가하는데 택배기사 소득은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시각 역시 합리적이다.

정부 대책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규제는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지만 유통산업발전법과 마찬가지로 시장 실패를 완전히 해소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란 뜻이다. 국회에도 택배기사 같은 특수고용노동자의 기본권을 담보하기 위한 여러 입법 논의가 있다. 산재보험 적용제외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나 이른바 과로사 방지법은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근본적 해법이 되기 어렵다. 기업은 비용 증가를 회피할 다양한 방법을 고안할 것이고, 낮아진 수수료와 더 비인간적인 알고리즘을 감당할 청년과 실직가장은 플랫폼 기업 앞에 여전히 줄을 설 것이다.


택배나 음식배달ㆍ대리운전ㆍ콜택시 등 플랫폼 기반 서비스는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우리는 이를 일궈낸 IT기업들에게 감히 '혁신'이란 훈장을 달아줬다. 문제는 혁신에 투입된 비용을 기업과 소비자 누구도 부담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2002년 3265원이던 택배값은 2019년 2269원이 됐다. 기업과 소비자가 단가 인하와 서비스 개선 비용을 택배기사에게 전가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한 결과다. 건당 700~800원에 불과한 수수료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더 긴 노동시간 만이 답이고, 이 사달의 원인이 됐다.


우리는 전보다 좋아졌는데 거의 공짜가 된 플랫폼 기반 서비스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 마땅히 내적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천천히 오세요'라는 캠페인으로 죄책감을 달래는 건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우리는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간 서비스에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플랫폼 기업은 빠른 배송에 합당한 가격을, 늦은 배송에는 또 그에 맞는 가격을 책정하고, 그 수익을 노동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사람의 목숨과 바꿔야만 얻어지는 혁신은 이미 악(惡)이다. 소비자는 사람의 생명을 볼모로 잡는 비열한 돈벌이와 합리적 대가를 요구하는 정당한 혁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클릭 몇 번이면 불법 다운로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력에 돈을 지불하는 게 정의'라며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 많아진 디지털 시장도 처음엔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다소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같은 작업을 기어이 해내야 하며 해낼 수 있다. 이것은 기업과 소비자 어느 한쪽도 주저하지 않고 동시에 움직일 때만 가능하다.


정부에 대책을 마련하라고 외치는 것으로 우리의 할 일이 끝나지 않는다. 정부가 만드는 규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다. 결국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용기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다. 그게 얼마일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최소한 800원은 아니지 않은가. 소비자 부담을 너무 쉽게 말한다고? 그렇다면 총알배송은 포기하라. 그것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신봉하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시장' 아니던가?

신범수 사회부장

신범수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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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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