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군정서의 비밀첩보조직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0년 6월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일본 정규군을 패배시켰다. 충격받은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 자체를 없애고자 했다. 일본군은 10월부터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간도(間島)로 '출병'했다.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다. 일본군의 작전은 이듬해 5월까지 약 8개월간 지속됐다.
일본군은 간도 출병으로 독립군의 근거지와 한인촌을 파괴했다. 이때 학살당한 한인이 수천명에 이른다. 이를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고 한다. 이후 일본의 조선군사령부는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간도출병사'에는 일본의 출병 전후 군부 및 외무성 상황, 중국과 협의 상황, 출병 후 실제 전투 상황, 이후 성과 분석 등이 자세히 정리돼 있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독립군은 어떻게 대처해 나갔을까.
'간도출병사'의 '제6장 장래에 대한 소견 및 참고 사항'에는 당시 독립군의 정보 수집과 전파 속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남아 있다. 일본군의 적정(賊情) 첩지(諜知) 및 통신·연락은 극히 곤란한 위치에, 반면 독립군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독립군의 체전식(遞傳式) 통신은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체전식이란 차례차례 여러 곳을 거쳐 빠르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일본군의 판단은 독립군이 체전식을 통해 미세한 징후도 놀라운 속도로 전달하고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일본군이 야식을 주문하거나 도시락을 만드는 것까지 시시콜콜 독립군에게 전파됐다.
"회령에서 마을 동네로 간단한 야식을 주문하거나 혹은 출동 경찰관 등의 가정에서 도시락을 만드는 것 등에 의해 우리 행동이 간파되어 모처럼의 기회가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음." "가노(加納) 토벌대가 동불사(銅佛寺) 부근을 초토하던 중에 압수한 서류에 의하면, 10월22일 히가시(東) 지대의 어랑촌 부근 전투통보가 이튿날 23일 십수 리 떨어진 동불사 부근의 국민회(國民會) 전원에게 도달한 적이 있음."
일본군의 기도 및 계획은 직접 계획에 참여한 장교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일본군은 또 조선인 사무원, 고용인, 순사보조원, 헌병보조원, 전화교환수 등에 의해 정보가 금세 사방으로 전파된다고 봤다. 행동 중 마주치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조심하고 급히 지나가야 할 경우 중국인·조선인 모두 억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당시 독립군의 정보 수집 능력과 전파 속도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11년 3월 서일을 중심으로 중광단(重光團)이 조직돼 1919년 4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됐다. 1919년 8월 대한정의단 산하에 독립군 무장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가 조직됐다. 이어 10월에는 민정(民政) 담당 대한정의단과 군정(軍政) 담당 대한군정회가 통합돼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결성됐다.
이때 서일,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이범석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사령부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김좌진·이범석 등 주도 대한군정서 민정시찰·기밀조사·통선전달 등 임무
육군 형법에 적용받는 준군사 조직…소속 인원 3000명 독립 위해 활약
일본군 도시락 만드는 것도 파악…탁월한 정보수집 ·전달력에 日도 놀라
대한군정부는 곧바로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연락을 취했다.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 기관으로 공인을 요청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대한군정부라는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바꾸라는 조건 아래 승인했다.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를 통해 임시정부 산하 대한군정서가 공식 출범했다.
대한군정서 산하에는 총재부, 사령부, 서무부, 세무부와 인사국, 경리국, 군법국, 모집국, 징모국, 기계국, 경신국 등 다양한 기관이 설치됐다. 기관의 서열은 조직의 중요도나 시급성에 따라 정하는 게 보통이다. 조직을 총괄하는 총재부와 군사를 담당하는 사령부가 가장 중요했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행정 담당 서무부와 재정 담당 세무부가 언급됨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나오는 여러 국(局)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이 '경신국(警信局)'이다.
경신국의 주요 임무는 경사(警査)와 통신(通信)이었다. 경사 임무는 민정(民情) 시찰, 각 단체의 행동과 적정(賊情) 정찰, 군사 기밀 조사, 내부 불순분자 색출, 임원 경호 등이다. 통신 임무는 신보(新報) 전파, 보도(報道) 및 통신 전달, 서령(署令) 및 선유문(宣諭文) 배포, 하물(荷物) 운반 등이다.
경신국은 만주·조선·연해주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해 빠르게 상부로 보고하는 비밀첩보 조직이었던 것이다. 경신국 아래 경신분국(分局)이 설치됐다. 대한군정서의 '경신분국규제(規制)' 제3조에 따르면 경신분국은 설치 순서대로 제1분국, 제2분국으로 명칭을 만든다고 돼 있다.
이정이 작성한 '진중일지(陣中日誌)'에서 경신 제34분국장 박순이라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다. 경신분국이 최소 34개 이상 설치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제6조에 경신분국의 인원은 국장 1명, 국원 약간 명, 서기 1명으로 한다고 돼 있다. 5명 내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분국당 평균 5명 기준으로 34개 분국 소속 인원을 계산하면 총 170명에 이른다.
경신분국 아래에는 경신분과(分課)가 설치됐다. 제8조에 분과도 설립 순서대로 제1분과, 제2분과 순으로 명칭을 만든다고 돼 있다. '진중일지'에서 경신 제1분국 제8과장 이경상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경신분국 산하에 분과가 8개 내외로 설치됐다고 볼 수 있다.
지역 사정에 따라 가감이 있겠지만 8개 분과 기준으로 분과원을 산정해보자. 제9조에 경신분과의 인원은 과장 1명, 통신원 5명, 경사원 3명, 서기 1명으로 한다고 돼 있다. 각 분과의 정원은 10명이었다. 그렇다면 총 34개 분국에 각각 8개 분과씩 설치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1개 분과 정원이 10명이고, 1개 분국은 8개 분과 80명이다. 34개 분국 산하 272개 분과에는 총 2720명이 소속돼 있었다. 분과 인원 2720명에 분국 인원 170명을 더하면 총 2890명이다. 3000명에 가까운 인원이 경신국 소속이었던 것이다.
경신국과 경신분국이 만주에 국한됐던 것은 아니다. 1922년 겨울 경성지방법원에서 일본인 경찰과 검사가 조선인을 신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충남 부여 출신인 강철구는 순사보조원을 거쳐 임시토지조사국 등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1916년 9월 간도로 이주했다. 거기서 천영(天英)학교 교사로, 대한군정서에서 서일의 비서로 활동하며 군자금 모집에 크게 관여했다. 이후 일제에 붙잡혀 신문받게 됐다. 이때 강철구는 "경신국장이 조선 각 군(郡)에 1명씩 분국장을 두고 군자금을 모집했다"고 증언했다.
1920년 7월3일 대한군정서 본부는 육군형법과 육군징벌령 각 40부를 인쇄해 경신국으로 보냈다. 경신국이 군 형법의 적용을 받는 준군사 조직이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경신국의 구성원들은 군인에 준하는 신분으로 활동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육군형법과 육군징벌령이 각 40부 인쇄됐다는 점이다. 이는 경신국 산하 경신분국이 34개가 아니라 40개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경신분국이 40개라면 경신분국의 인원은 200명이며 경신분과의 인원은 3200명이다. 경신국은 인원이 3400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경신국의 하부조직이 30~40개 분국과 8개 안팎의 분과를 가졌는지, 그리고 이들의 규모가 3000명에 달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한군정서에 적극 협력하고 자원한 이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독립군의 눈과 귀가 돼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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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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