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 '전망 좋은 방'. 영화의 주인공은 루시(헬레나 본햄 카터)다. 루시의 약혼자는 세실(다니엘 데이 루이스)이지만 루시는 첫 키스의 상대 조지(줄리안 샌즈)와 맺어진다.
세실이 루시를 포기하는 장면은 흥미롭다. 세실이 테니스 때문에 너무 쉽게 루시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루시가 조지, 남동생 프레디(루퍼트 그레이브스)와 함께 즐겁게 테니스를 치는 장면에서 테니스에 관심이 없는 세실은 홀로 따로 떨어져 책을 읽는다. 루시는 테니스를 끝낸 후 돌변한다. 세실은 자신이 테니스를 같이 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테니스 때문에 활달한 성격의 루시와 샌님인 자신과 성격차가 드러났고 이를 확인한 루시가 자신과 헤어지려 한다고 생각한 것. 사실 루시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세실이 책에 빠져있는 사이 조지로부터 기습 키스를 당한 때문이다. 루시가 조지와 키스를 나눈 것은 두 번째. 잊고 있었던 몇 년 전 조지와의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도 떠오르며 루시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세실은 자신이 테니스를 같이 치지 않아 루시의 마음이 돌아섰다고 생각하며 쉽게 루시를 포기한다. 관객 입장에서는 실소가 나올 정도로 황당한 장면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배경이 되는 영국에서 테니스라는 스포츠가 가진 문화적 위상을 보여주는듯 하다.
테니스는 얼핏 보면 지루한 스포츠다. 5세트로 진행되는 메이저 대회 토너먼트에서는 경기 시간이 3시간을 넘기 일쑤고 4시간, 5시간을 넘는 경기도 더러 나온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테니스에서 가장 큰 묘미는 '다운 더 라인(Down The Line)'이 아닐까 싶다. 다운 더 라인은 테니스 코트의 사이드 라인을 따라 직선으로 이뤄지는 공격을 뜻한다.
테니스는 기본적으로 대각선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스포츠다. 규정상 서브를 대각선으로 넣어야 한다. 시속 200㎞가 훌쩍 넘는 속도로 넘어오는 테니스공을 맞받아쳐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일.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선수는 대각선으로 공을 주고받으며 랠리를 펼친다. 이 때 지루한 랠리의 흐름을 한 순간에 바꿔주는 것이 다운 더 라인이다. 대각선으로 공을 주고받다 직선으로 향하는 빠른 공격으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공격. 긴 랠리 끝에 터지는 다운 더 라인은 야구의 홈런, 축구의 골만큼 짜릿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삶을 사는 태도와도 연관시킬 수 있을듯 하다.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풀리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테니스공을 계속 맞받아치며 때를 기다리다 결정적인 순간 다운 더 라인 한 방을 날리는 것.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라파엘 나달은 경기 중 물을 마신 뒤 물통을 늘 같은 위치, 같은 방향으로 놓는다. 방송 카메라를 통해 나달의 기행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나달의 기행의 이유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 속에서 하나만이라도 자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하니, 최고의 선수에게도 삶만큼이나 테니스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상장 첫날 70% 폭등 "엔비디아 독주 끝나나"…AI ...
사전에서 다운 더 라인은 다가올 미래의 어느 시점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선을 따라 죽 가다 보면 저 길 끌에 무언가 있다는 의미다. 저 길 끝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왕이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선을 따라 죽 가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바처럼. 아바는 1980년, 한 해를 보내는 망년회 파티가 끝나고 난 뒤 씁쓸함을 노래한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를 발표했다. 노래 속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담겨있다. "우리가 전에 가졌던 꿈은 모두 죽어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발견할지,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What lies waiting down the lin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