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안전핀' 해피콜 녹취·자필서명…보험사·설계사 면피에 악용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정몽진(68ㆍ가명)씨는 최근 종신보험을 해지했다가 환급금이 예상보다 적어 A보험사를 상대로 이의를 제기했다. 3년 전 설계사 B씨로 부터 더 좋은 조건의 보험이라고 '변액종신보험'을 소개받은 정 씨는 "최소 3년 간 보험료를 내면 해지환급금이 기존 보험과 다르지 않다는 B씨의 설명에 갈아탔다"고 말했다.
하지만 3년 넘게 보험료를 냈지만 돌려받은 돈은 예상 환급액(8800만원)의 3분의1 수준인 2250만원. A사는 정씨가 종신보험으로 알고 가입했다는 해피콜 녹취 기록과 환급금 예상액 등이 담긴 계약서에 자필 서명을 했다는 근거로 "절차상 문제가 없다"며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씨는 "해피콜 녹취와 자필 서명만으로 설계사가 영업 과정에서 상품 설명을 잘못 전달했다는 주장을 사측이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며 "잘못된 영업 관행을 저질러 놓고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보험의 완전판매를 위한 '안전장치'로 자필 서명과 해피콜 녹취를 의무화했지만 오히려 소비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설계사의 상품 설명이 보험 계약 사실과 다른데도 녹취 기록과 약관이 보험사나 설계사의 '면피'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어서다.
7일 금융당국 및 보험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생명보험 판매과정에서 발생한 민원 9346건 중 종신ㆍ변액보험 불완전판매 관련 민원은 63.0%(종신 33.7%, 변액 29.3%)를 차지했다. 10건 중 6건이 종신ㆍ변액보험 판매에 대한 민원이었다는 얘기다. 특히 같은 기간 전체 민원건수가 전년대비 5.4% 감소한 반면 관련 민원은 13.3% 늘어났다.
이중 상당수는 해피콜과 자필 서명에 따른 민원제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피콜 녹취 제도는 보험 불완전판매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2012년 도입됐다.
소비자가 상품을 이해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판매과정에서 설명이 제대로 되었는지 사후에 점검하는 대표적인 모니터링 제도다. 보험사는 청약철회 가능기간에 계약자에게 전화로 보험의 중요한 내용을 확인하고 이를 녹취해 보관해야 한다.
자필서명은 보험 계약 체결과 모집 과정에서의 의무 요건이다. 금융감독원은 보험계약의 중요 사항에 대한 설명을 누락하거나 보험계약자 동의 자필서명을 미이행할 경우 제재조치를 가한다. 상법에서도 '타인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하는 생명보험은 보험계약 체결시에 그 타인의 서면에 의한 동의가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해피콜 녹취와 자필서명을 의례적인 절차로 생각하고 쉽게 동의했다가 피해를 받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계사의 설명과 보험 계약 내용이 다를 경우 설계사의 설명을 직접 녹취하거나 자료로 남기지 않으면 사실상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보험업계의 중론이다. 해피콜 녹취와 자필서명이 계약 단계에서 충분한 설명을 들었다는 근거가 됐기 때문이다.
최근 지적장애인에게 5년 동안 무려 78건의 보험을 가입시킨 설계사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사례에서도 해피콜 녹취와 자필서명이 '보험 가입 절차상 문제없다'는 근거로 활용된 바 있다.
금융당국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2018년 설계사 설명 녹취 의무화 방안을 보험업계와 논의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설계사의 영업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고객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고 계약서와 법적 효력이 충돌하거나 녹취 관리에 드는 경제적 부담 등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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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업계 관계자는 "설계사의 설명과 보험 계약서나 약관 내용이 같은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설명과 다를 경우에는 보험사 콜센터나 다른 설계사에게 확인해야 한다"며 "설계사와 주고 받은 문자나 메일 등 자료로 남겨서 보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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