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수련'에 집착한 모네, 인상주의 꽃피웠다
파리에서 80㎞ 떨어진 지베르니 정착 후 집에 연못 만들고 정원 가꾸기 열중
1890년대 말부터 '수련' 그리기 시작…1909년 전시회 성공으로 명성·富 쌓아
공들였던 오랑주리 전시 못 보고 영면…현재 마르모탕모네 미술관이 새 성지로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층에는 두 개의 커다란 타원형 전시실이 있을 뿐이다. 이 두 전시실은 모네의 대형 패널화 '수련'으로 벽 전체가 덮여 있다. '수련'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든다. 인상주의 사랑이 유난스러운 일본인, 한국인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모네는 1890년대 말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베르니에 정착한 지도 15년이 흘러 있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지만, 1883년 모네가 이사 갔을 때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센강의 지류인 엡트강이 지베르니를 스쳐 가까운 센강으로 흘러든다. 엡트 강가에는 포플러와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고, 센강 건너편 언덕에는 작은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모네를 이곳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지베르니에 이사할 때만 해도 모네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무리해서 집을 옮긴 후 모네는 자기가 사고 친 게 아닌지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모네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1880년대 말 인상주의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돌아서고, 그림값이 오르면서 모네는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네는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다. 가난할 때도 집을 구하면 마당에 화초부터 심었다. 지베르니에는 원래 손바닥만 한 마당이 딸려 있었으나 모네는 주변 땅을 사들여 정원을 넓혀갔다. 1893년 모네는 앱트 강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시골 사람들 생각에 물길이란 물레방아를 돌리거나,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데 쓰는 것이지 연못에 물을 대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네는 화를 내며 자신의 계획을 고집했다. 지방관청은 이제 대가가 된 모네를 무시하지 못하고 허가를 내주었다. 연못을 만들지 못했다면 '수련'도 없었을 것이다.
정원에 색깔 맞춰 꽃을 심고, 연못에 수련을 심는 데 열중하던 모네는 어느 날 붓을 들어 연못을 그리기 시작했다. 1897년 여름 모네는 ‘거대한 수련 그림으로 벽 전체를 둘러싼 방’을 구상했다. 훗날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실현될 아이디어가 이때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려면 별도의 작업공간이 필요했다. 모네는 정원 한구석에 있던 오두막을 헐고 천장으로 빛이 들어오는 작업실과 창고, 거실과 침실을 갖춘 별도의 스튜디오를 짓기 시작했다. 1899년 스튜디오가 완성되었다.
1900년 예순 살이 된 모네는 뒤랑 뤼엘 화랑에서 첫 번째 '수련' 전시회를 열었다. 12점의 수련이 전시되었다. 1901년에는 연못 확장 공사를 하느라고 수련을 그리지 못했다. 1903년 연못은 다시 수련으로 가득 찼고 모네는 그림에 달려들었다. 1909년에 열린 '수련'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뒀다.
1860년대에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모네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인상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모네는 붓 하나로 명성과 부를 쌓아 올렸다. 수련이 활짝 핀 지베르니의 정원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우울한 말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1년 부인 알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알리스는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화가와 부유한 후원자의 아내로 만나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루고 30년 이상을 함께 살아왔다. 모네는 슬픔에 빠져 한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1914년에는 지병을 앓던 맏아들 장이 세상을 떠났다. 바깥세상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죽고 있었다. 전쟁은 지베르니 턱밑까지 와있었다.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과 알리스의 아들 장 피에르 오슈데는 입대했고, 지베르니에는 야전병원이 들어섰다. 일흔이 넘은 모네는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수십 년 동안 야외에서 그림으로 그리며 직사광선 아래 눈을 혹사한 결과였다. 하지만 모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 그리는 일뿐이었다.
1914년 모네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수련' 연작에 착수했다. 수십 개의 캔버스가 쌓여갔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선포되었다. 다음 날 모네는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 동안 죽은 넋을 위로하고, 평화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대형 '수련'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편지였다. 클레망소는 모네와 젊은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진보적인 언론인으로 프랑스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 애썼으며 1917년 수상직에 오른 터였다.
모네는 연작을 그릴 때면 여러 캔버스를 동시에 시작해 전체적으로 색조와 분위기를 맞춰가며 완성했다. 모네가 작품과 씨름하는 동안 클레망소는 전시 공간을 물색했다. 처음에는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로댕 미술관이 물망에 올랐다. 오랑주리 안을 제시한 사람은 클레망소였다. 오랑주리는 튈르리 궁전의 온실이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잡다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클레망소는 틈틈이 지베르니로 찾아가 쇠약해진 모네를 격려하는 한편 해당 부처와 협의해 오랑주리를 전시 공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모네는 자신의 '수련'이 미술관에 걸린 것을 보지 못하고 1926년 12월 눈을 감았다. 다음 해 클레망소가 참석한 가운데 오랑주리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두 개의 타원형 전시실은 8점의 '수련'으로 둘러쳐졌다. 높이 2미터, 8점을 모두 연결하면 폭이 91미터에 달했다. 제1 전시실 네 개의 패널은 각각 ‘물에 비친 구름’, ‘아침’, ‘녹색 그림자’, ‘일몰’을 묘사하고 있다. 제2 전시실 네 개의 패널은 물가의 버드나무와 연못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이 커다란 그림 앞에 서면 하늘과 물, 빛 속에 풍덩 빠져든 느낌을 갖게 된다. 모네의 예술 인생을 결산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수련'은 인상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모네는 말년에 풍경을 관찰해 재현하는 인상주의 방식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대신 그의 관심은 색채 자체와 색의 조화로 옮겨갔다. '수련'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후기로 갈수록 표현 대상이 무엇인지는 덜 중요해지고, 빛과 대기가 만들어내는 색채의 변화, 분위기가 더 중요해짐을 알 수 있다. 종국에는 연못임을 나타내는 지시적 요소는 아예 사라지고 빛의 반사, 물의 투명함, 거기 비친 하늘, 어른거리는 그림자만 남는다. 추상화가 칸딘스키가 모네의 후기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오랑주리 미술관의 북적거리는 현재 모습과는 달리 개관 당시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말 사람들의 관심은 추상, 큐비즘, 초현실주의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에 쏠려 있었다. 인상주의는 한물간 사조로 취급되어 잊혀가고 있었다. 오랑주리가 인기 있는 미술관이 된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다. 전후 세계 미술관들이 인상주의 기획전을 열고, 연구서가 나오고, 미술시장에서 인상주의 작품이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오랑주리는 관람객으로 붐비게 되었다.
모네가 43년을 살았던 지베르니는 둘째 아들 미셸에게 상속되었다. 모네의 의붓딸이자 며느리인 블랑슈 오슈데가 지베르니를 관리했다. 알리스의 딸인 블랑슈는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모네의 아낌을 받았다. 자라서 모네의 맏아들 장과 결혼했다. 1914년 장이 죽은 후에도 모네 옆을 지키며 지베르니를 관리했다. 1947년 블랑슈가 세상을 떠나자 지베르니는 잡초가 무성해졌다.
미셸은 1966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없었던 미셸은 아버지의 작품과 컬렉션, 지베르니를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써놓은 상태였다. 아카데미는 지베르니를 보수하고 관리할 자금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
1970년대 말 미국 부호들이 기금을 조성해 지베르니는 복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80년 일반에 공개되었고 오늘날 연간 50만 명이 찾는 명소다.
모네가 그린 '수련'들 대부분은 현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1914년부터 1926년까지 125점의 '수련'을 그렸다. 그중 8점을 국가에 기증해 오랑주리 미술관이 탄생했다. 나머지는 미셸에게 상속되었다. 위에 말했듯이 모네가 죽었을 때 인상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관람객이 없어 텅 비었고, 미셸은 상속받은 수많은 '수련'을 팔 수도 없었다.
'수련'을 기증받은 아카데미는 마르모탕을 전시 공간으로 택했다. 미술관이 너무 좁았으므로 정원을 파서 지하에 새 전시실을 만들었다. 1970년 마르모탕 미술관은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했다. 오늘날 모네를 위한 또 하나의 성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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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 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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