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정치의 과잉과 행정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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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이라는 학문의 태동은 정치로부터 행정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1829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 취임 이후 정권교체에 따라 공직자가 교체되는 엽관주의(獵官主義) 인사제도로 행정의 부패, 비능률이 심화했다. 이에 정치적 입장과 관계 없는 능력 중심의 임용방식인 실적주의 확립으로 행정을 탈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887년 미국의 정치학자로 후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은 '행정의 연구'라는 논문에서 행정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법 집행(detailed and systematic execution of law)'으로 정의하면서 정치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행정학의 시초다.

다만 1930년대 대공황으로 행정이 정책 형성에 관여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행정은 기계적인 법 집행으로 볼 수 없게 됐다.

오늘날 행정은 관리 기능과 함께 정책 형성 기능도 갖고 있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다시 말해 행정이란 정치 권력이라는 배경 아래 공공정책 형성 및 구체화를 이룩하는 행정조직의 집단행동으로 정치와 경영의 혼합이다.


한국은 어떤가.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비민주적 정권 아래 정치가 행정을 압도했다. 하지만 1960~1970년대 산업화 추진 과정에서 전문 기술관료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행정도 나름 자율성을 인정 받게 됐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주기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엽관주의 인사가 강화되고 정권 재창출 의지가 강해지면서 정치가 행정보다 우위를 점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회는 법률안 제출 건수에서 행정부를 압도한다. 모든 사회적 갈등과 이슈가 국회에서 논의되고 해결 방향이 정해진다. 대통령실은 행정 각부의 정책 대부분을 정무적 차원에서 관여하고 조율한다. 그 결과 행정의 효율성과 합리성 구현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중요한 다수 의제에 대한 정책 결정이 국회에서 이뤄지면서 나타나는 문제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체계적ㆍ포괄적으로 대안에 대해 분석해 가장 합리적 대안을 선택하기보다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대안을 택하거나 기존 정책에서 약간 향상된 대안을 추구하는 점증적 방식이 주가 되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은 행정의 의사결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국회에서 의사결정은 이해관계자 간 타협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이는 갈등의 원만한 해결책일 수 있지만 영향력이 좀 더 강한 집단에서 요구하는 방향으로 타협돼 오히려 국민의 이익은 외면당하기도 한다.


게다가 국회는 다른 중요한 정치 이슈가 있거나 갈등이 극심할 경우 의사결정을 계속 지연시켜 문제 해결이 방치되곤 한다. 최근 데이터 규제 완화, 모빌리티 혁신과 관련된 국회의 의사결정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 이런 정치의 과잉에는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 양자가 적정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정치가 행정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어 행정은 적극적 자세로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행정을 옥죄는 과다한 조정, 통제, 감사 기능은 축소할 필요가 있다. 사무관 1인의 정책안을 갖고 부처 내 기획조정 부서, 총리실, 대통령실, 감사원, 국회 등 많은 부서가 지휘감독에 나선다. 전장에서 소총수는 한 명인데 지휘관이 열 명인 셈이다.


정치에는 임기가 있지만 행정은 지속돼야 한다. 행정은 어떤 정권하에서도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 정파성을 배제하고 공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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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사이버법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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