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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아일랜드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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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아일랜드에 있습니다. 조카가 외국청년과 가정을 꾸린대서, 결혼식 참석차 비행기를 탔습니다. 하지만 워낙 먼 길인데다, 쌓인 일감도 많아서 선뜻 행장을 꾸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축시를 지어서 직접 읽어주겠다는 약속만 안했어도, 다른 식구들 편에 마음만 보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약속을 지켰습니다. 한복을 입고 서양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읽었습니다. 우리말로 먼저 읽고, 영어로 읽었습니다. 제목은 '아일랜드의 약속.' 첫머리가 이랬습니다. "약속이 잘 지켜졌습니다./오기로 한 손님들이 다 모였습니다." 서울에서 지어온 시가 실제 상황과 비슷해서 낭송의 기쁨이 컸습니다.

테이블마다 놓인 명패에는 세계 각지의 지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떠나온 도시와 나라 이름입니다. 런던, 뉴욕, 캐나다, 뉴질랜드, 스위스, 상하이, 서울.... 절반쯤은 신부와 관계된 장소입니다. 서울서 나고 뉴질랜드에서 자라서, 뉴욕에서 대학을 나오고 스위스에서 일하는 까닭입니다.


자연도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태양은 새벽같이 와서 잔치마당을 밝히고,/새들은 밤을 새워 축하의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제 시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이, 온갖 꽃들이 때맞춰 피어났습니다. 제 눈에는 낯선 새들이, 자기들 말로 노래하며 날아다녔습니다. 드넓고 아름다운 농장이었습니다.


제 짐작처럼, 바람과 구름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청량한 바람이 동서남북의 구름이란 구름을 모두 몰고 왔습니다. "먼 나라 구름들도 시간 맞춰 도착했고,/모여든 바람은 살던 마을에서/가장 좋은 향기들을 품고 왔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줄곧 목격한 풍경인데, 이 나라 하늘은 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비가 쏟아지나보다 하면, 금세 해가 납니다. 지붕 저쪽은 어둑한데, 머리 위는 눈부십니다. 아일랜드 하늘은 구름목장이거나 구름공장입니다. 구름의 조각보나 모자이크입니다. 구름의 도감(圖鑑)입니다, 전집입니다, 백과사전입니다. 365일의 구름을 하루에 다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낭송을 끝내자,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칭찬의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제임스 조이스, W.B.예이츠, 새뮤얼 베케트, 조지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등 위대한 작가들의 고향다웠습니다. 제게 굳이 시를 부탁해온 신랑신부의 뜻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옷차림에 대한 찬사도 많이 들었습니다. '여인들 치마저고리의 고운 곡선, 남자들 두루마기의 기품과 위엄...' 야단스러운 빛깔은 하나 없는데, 흐린 하늘 아래서도 마냥 도드라진 모양입니다. 중국 소수민족 보듯이 신기해하는 눈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구체적인 관심을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습니다.


한복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이렇게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옷이 말을 했습니다. "한국인은 좋은 날을 맞으면 이렇게 차려입는다. 오래된 약속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 우리가 '백년의 약속(百年佳約)'이라고도 부르는 결혼식 날. 마침 민들레와 엉겅퀴가 지천이고, 수국이 탐스러워서 우리나라 시골집 마당 꽃밭 같다."


어디를 보아도,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 맑게 울려 퍼지는 초원입니다. 태초의 풍경과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천년만년 지내온 녹색 들판이 아직도 새것처럼 보입니다. 양과 소와 말들이 어찌나 맛있게 풀을 뜯는지! 이다음에 짐승으로 태어나면, 즐거이 저런 풀을 먹고 싶습니다.


술 한 잔을 마시며 생각합니다. '아일랜드가 가난과 통한의 역사를 넘어, 세계적인 맥주와 위스키 나라가 된 것도 자연과의 약속을 잘 지킨 덕택이다.' 약속은 꼭 지키고 볼 일입니다. 아이슬란드의 '빙하(氷河)'가 어째서 죽었겠습니까.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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