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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1/오태환

최종수정 2019.08.05 15:57 기사입력 2019.08.0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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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는 없다 북양의 흰 유빙 사이를 떠돌던 귀신고래는 이제 없다 구약 예레미야서 23장 6절과 졸피뎀 10mg과 세작들의 우울한 저녁 식탁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무슨 환부 같은, 페름기의 사력질 화석 안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참수를 금방 끝낸 IS 병사의 검은 피 묻은 소맷자락에도 그의 검은 복면이 불현듯 돌아보는, 다마스쿠스 근교 와디의 눈부신 정적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나침반과 컴퍼스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사이버펑크 시대, 봄비 같은 종아리들이 봄비같이 붐비는 부부 스와핑의 현장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달빛 받는 AK-47 소총의 푸른 그림자에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미제 사건 파일의 사건 번호 목록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하마 마지막 숨을 느리게 쏟으며, 어느 늙은 북경원인이 무심히, 지켜봤을 주구점(周口店)의 택지재개발공사 같은 햇살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그 햇살 아래 비계처럼 가설되는 금잔화 떼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무기 밀매 업자의 대장 내시경에도 전직 대통령의 차명 계좌 잔고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구제역으로 집단 폐사한 돼지들이 개처럼 모여 짖고 있을지 모르는, 화성과 목성 사이 소행성대의 춥고 어두운 중력 방정식 안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밤마다 정치적 망명을 도모하는 한 시인의 물방울처럼 상한 시집 갈피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그대가 오래 울다가 깨어난 새벽, 도무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꿈의 그, 으슥한 그늘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오늘 오후 두 시 십칠 분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그러니까 귀신고래는 없다



■이 시에서 "귀신고래"는 무엇일까? 물론 "귀신고래"는 비유다. 일단 "귀신고래"는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여러 번 반복되는 "귀신고래는 없다"라는 문장 앞을 보면 다양한 장소들이 적혀 있다. 어쩌면 그 장소들은 귀신고래가 있었거나 있을지도 모를 곳이다. 그러나 그 장소들은 도무지 꿰어지지도 않고 종잡을 수도 없다. 따라서 그곳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보는 게 차라리 옳다. 그렇다면 "귀신고래"는 '어디에도 없는 그 무엇'인 셈이다. 지금 당신 곁 '어디에도 없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당신이 아닐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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