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새해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한겨울에 야외에서 한껏 당겨 웃어도 멀쩡하던 맨입술이 찢어지기 시작했고, 악성지성이던 두피는 지성과 중성 사이쯤으로 보송하다. 구둣발로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나도 모르게 "아, 내 도가니"라는 외침이 나온다. 통, 통, 하고 갈지자로 튀는 '북한산 날다람쥐식' 하산(下山) 방법은 양 손을 양 무릎에 두고 더듬더듬 하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변화를 꼽자면 TV 시청 취향이다. 예능과 가요, 드라마 채널에서 멀어지고 리모컨을 돌리던 손이 자꾸만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멈춘다.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 아저씨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는게 좋고, 물질 하는 해녀나 테이블을 만드는 목수가 자기일을 하는 모습은 한 시간도 더 볼 수 있다. 지난해 재미있게 본 영화로 시골에서 농작물 지어 먹는 얘기, '리틀 포레스트'를 가장 먼저 꼽는다.
리틀 포레스트의 원작을 쓰고 그린 이가라시 다이스케는 국내판 영화 재하(류준열) 역할인 유우타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직접 체험해보고 그 중에서 자신이 느낀 것과 생각한 것, 그런 것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을 존경해.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잖아? 타인이 만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기만 하는 인간일수록 잘난척만 하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기만. 이 대목에 속으로 밑 줄을 두 번 긋고, 뜨끔해 하면서 수첩에 그걸 또 옮겨 적었다. '나도 나름 열심히 일하는데, 말을 좀 심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기는데, 어퍼컷이 훅 들어온다. 유우타가 내게, 아니 주인공에게 말한다. "너 혼자서 열심히 사는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자신을 속이기 위해 그때그때 '열심히' 해서 얼버무리는 느낌이 들어." 자연인의 시청률이 높아지는건, 오른쪽과 왼쪽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얘길까.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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