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영의 갤러리산책] 여성지위 달라졌다는 말, 저 말만 봐도 알겠다
서양 명화의 재탄생…정해진 개인전 '밸런스'
고개 숙이고 차분한 말 역동적 말로 교체
삼미신 속 백인은 황인·흑인으로 바꿔 풍자
전통아교 사용한 진채법, 색 깊이감 구현
"우리재료와 기법으로 가능하다는 것 보여주고파"
[아시아경제 김세영 기자] 정해진(40)이 그린 서양의 명화는 원작보다 훨씬 부드럽고 섬세하다. '다른 그림 찾기'처럼 원작에선 발견할 수 없는 요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명화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위트와 풍자를 넣어 독특하다. 작가의 손을 거친 명화 속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늦가을'은 정해진의 대표작이다.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말을 탄 여왕 마르가리타'를 패러디했다. 원작과는 달리 앞발을 들어 올린 강인하고 역동적인 말을 표현해 여왕의 지위와 권위, 과거와 다른 여성 역할의 변화, 더 나아가 중년여성으로서 새로운 도약과 기상을 나타냈다. 제목이 '늦가을'인 이유도 50대는 '겨울을 준비할 수 있는 풍성한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서양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명화에 바탕을 두었다. 하지만 원작과 달리 정해진은 우리나라 전통채색 기법인 진채법(석채·광물성 안료를 사용해 종이나 비단에 그리는 기법)을 따랐다. 비단에 전통아교를 사용하는 진채법은 고려시대 불화의 채색법이기도 하다.
작가는 "2014년 르네상스 시대 작품을 소재로 개인전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전통채색화에 쓰이는 석채가 똑같이 쓰였다. 안료는 같지만, 접착제가 다를 뿐이다. 우리나라는 아교, 서양은 템페라(달걀노른자를 접합체로 쓴 투명 그림물감)다. 우리 재료와 기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려불화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보다 100년이 앞선다"고 했다.
결과물의 차이는 선명하다. 앞에서만 칠해 잘 갈라지는 서양의 석채와 달리 진채는 비단에 앞과 뒤를 모두 칠해 앞에서는 매우 고르고 평평하며 색의 깊이감까지 구현한다. 덕분에 말아서도 보관할 수 있어 지금까지 보존이 잘된 작품이 적지 않다. 양면을 모두 칠하기 때문에 제작시간은 두 배 이상 걸린다.
이렇듯 '우리 것'에 대한 정해진의 자부심과 애정이 남다른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2001년 한성대학교 회화과(동양화)를 졸업하고, 2005년 동대학원에서 진채화를 공부해 석사 학위를, 지난해에는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에는 문화재 수리기능사(문화재수리 기능자 모사공 7144호)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8년 문화재청에서 주최한 예천 용문사 괘불(1705) 모사초 제작에 참여하는 등 각종 탱화, 초상화, 고택 박물관 리뉴얼 제작까지 담당했다.
진채법을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는 방안도 찾고 있다. 정해진은 "전통을 계승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 과정이 꽤 복잡해 접근도 쉽지 않았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진채법을 배울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최근에는 디자인과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명화는 한국전통 채색 기법을 통해 더 완벽한 시각예술로 되살아난다. 작품은 동서양이 절묘하게 조화돼 균형을 이룬다. 또 다른 의미의 균형도 있다. 작가는 "과거에는 여성이 대체로 연약한 이미지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작품 안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 여성의 역할에 균형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균형을 위해 호피가 자주 등장한다. 2010년부터 차용하기 시작해 이제까지 호피를 주제로 초대전을 네 번 치렀다. 호피는 우리 선조들의 초상화에서 강인함과 권력 또는 부를 과시하는데 쓰였다. 왕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만 소유할 수 있는 호피를 현대미술로 표현함으로써 여성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호피는 모든 작품에 들어간다. 특히 호피무늬 사과는 작가의 심벌마크다. 호피와 사과, 전혀 다른 의미를 '이종교배'했다. 패턴이 주는 강렬한 호피무늬와 선악과를 연상시키는 연약한 사과를 합쳤다. 호피사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함축한 새로운 창작물이다.
정해진은 "호피를 좋아한다. 예전부터 문화재 수리를 하면서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기도 했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다. 과거 호피의 의미는 지금과 많이 다르다. 호피는 변신의 도구다. 말하자면 위장이다. 여성들이 호피를 선호하는 이유는 나약함을 가리고 강인함을 어필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됐다. 반대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했다.
원화에 있던 중요한 상징적 요소도 교체해서 표현한다. 작가의 재치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트리니티'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의 '삼미신'을 패러디했다. 모두 백인인 원작과 달리 흑인과 황인을 끼워 넣었다. 그런가하면 '작업실의 손님들' 안에 우리나라 일월오봉도, 진채를 그릴 때 비단에 실을 꿰어 만든 쟁틀을 그려 넣었다. 또 샤넬백, 문신,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등 이질적 요소가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모두 풍자와 위트를 위한 것이다.
작가는 "명화 속 여자들이 꽃 대신 칼과 방패를 들고 나갔으면 세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또 그림 속 아이들이 2017년에 왔다면 꽃을 들고 공주 행세를 할 순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명화 속 여성들의 변화된 이야기는 현대여성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정해진은 "서양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은 다를 줄 알았는데 동양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양에서의 여성은 화려한 옷을 입긴 하지만, 앞장서는 진취적인 모습은 없었다. 항상 고개 숙인 말 위에 앉아있거나 조용하게 걷고 있는 식으로만 표현됐다. 앞으로도 적극적인 여성상을 그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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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문을 연 정해진의 개인전 '밸런스'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내달 4일까지 이어진다. 올 해 신작 스무 점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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