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총회 제정…일제 항거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고종실록(권46)에 실린 을사조약전문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종실록(권46)에 실린 을사조약전문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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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윤신원 기자] 112년 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오늘(11월17일)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날이다. 많은 민중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항거하거나 순국했고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회는 이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망국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했다.

순국선열(殉國先烈)은 말 그대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먼저 죽은 열사를 뜻한다. 즉 한일협상조약으로 나라를 잃은 날부터 1945년 8월14일 광복 직전까지 국내외에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 유공자를 칭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회는 왜 이들을 기리는 날을 ‘망국일’로 정했을까. 우리나라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17일을 망국일로 본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민중들은 자주권을 외치며 반대 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까지 이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는 날이다.

을사늑약은 과거 을사조약이라 불렸지만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것을 비판하는 뜻에서 명칭을 변경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에 앞서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제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둬 재정권과 외교권을 빼앗았다. 다음해인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 외교권의 완전한 박탈을 위해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형식적 국명만 가진 나라로 전락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의 명분으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동아시아 공동의 평화를 구축을 내걸었다. 사실상 을사늑약은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대한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함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 체결을 위해 일본군을 동원해 궁 인근을 포위하는 등 고종 황제를 압박했지만 고종은 끝까지 체결을 거부했다.


고종의 거부로 이토는 하야시 곤스케를 시켜 박제순을 불러 강박하는 등 대신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토의 강요에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한 민영기, 이하영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이를 찬성했고 결국 조약은 가결됐다. 이들을 ‘을사5적’이라 부른다.


을사늑약 이후 다른 나라 공사관들이 모두 철수했고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러자 민중들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을 발표했고 민영환은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에게 해산당한 후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남긴 후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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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는 대대적인 항일 의병도 일어났다. 일제는 ‘남한대토벌’이라는 이름하에 의병전쟁을 종식시키고 끝내 경술국치(1910년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를 이뤘다. 이 때 일어난 의병운동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훗날 대한민국 정부는 이 운동들을 토대로 ‘대한제국이 원해서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이룬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했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상호 확인했다.


한편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회가 만든 ‘순국선열의 날’은 광복 이후 광복회등 민간단체가 주관하여 추모행사를 거행하다 1997년 정부기념일로 제정됐다.


윤신원 기자 i_dentit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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