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金요일에 보는 경제사]강추위가 프랑스대혁명 일으켰다? '한파경제학'

최종수정 2016.12.30 10:33 기사입력 2016.12.30 10:29

댓글쓰기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진= 위키리크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진= 위키리크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프랑스 대혁명과 관련한 그림이나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외투까지 걸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당시 복색이 대부분 치렁치렁한 옷이 많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옷을 입었을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날은 1789년 7월14일, 한여름이다. 영상 40도를 오고갈 무더위에 저런 옷을 입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파리가 위치한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방은 한겨울에도 영상 2도 이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지역. 변덕이 심한 날씨가 변수라고 해도 한여름 복장으로는 과도하게 껴입은 모습이다. 대혁명보다 한달 전인 6월 발생한 '테니스코트 선서'를 묘사한 그림에서도 모두 여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들을 하고 있다.

1789년 6월20일 발생한 테니스코트 선서 그림(사진= 위키백과)

1789년 6월20일 발생한 테니스코트 선서 그림(사진= 위키백과)


사실 사람들이 그렇게 껴입고 있는 이유가 있다. 1789년 7월14일 한낮기온이 영상 7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낮에 7도 정도였으면 쌀쌀한 초가을 날씨다. 1780년대에는 겨울이 모두 무척이나 추웠다고 한다. 온갖 폭정과 전쟁을 일삼던 루이14세와 15세 때도 묵묵히 견뎠던 프랑스 국민들이 별다르게 사치를 벌인 적이 없는 루이 16세 때 일제히 봉기한 것도 바로 이 강추위 때문이었다고 한다.

강추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1750년대부터 시작된 소빙기(little ice age) 현상으로 알려져있다. 소빙기는 지구 전체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지표면 빙하가 크게 늘어나고 각종 기상이변이 일어난 시기를 뜻한다. 16세기 말부터 시작돼 1560년대, 1750년대, 1850년대 극심했다.

여기에 1785년 아이슬란드에서 폭발한 화산과 중남미 지역에서 발생한 엘리뇨까지 겹치면서 180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에서 기상이변이 급증했다. 중남미 지역에 태풍이 자주 발생해 쿠바와 서인도제도 일대 농장들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농장주들이 대거 유럽으로 돌아오는 일도 많았는데 그 중에는 훗날 나폴레옹의 연인이 되는 조세핀(Josephine)의 가정도 포함돼 있었다.
조세핀 초상화. 그녀의 고향은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의 트르와질레였다.(사진= 위키백과)

조세핀 초상화. 그녀의 고향은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의 트르와질레였다.(사진= 위키백과)


소빙기현상의 여파로 시작된 추위는 일단 농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서양의 주식인 빵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전 근대시대에는 농업생산량과 인구증가량이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빵값이 거의 고정돼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1761년부터 1780년대까지 20여년만에 빵값이 갑자기 7배나 뛰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대체로 기후가 온화했던 유럽에선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연료문제였다. 한여름에도 계속 난방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크게 늘어난 수요로 인해 목재 땔감을 구하기 힘들게 되자 석탄, 석유 등 대체 자원 사용을 위한 방법이 연구됐고 이는 1770년대 증기기관의 발명과도 연결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루이16세가 이끌던 프랑스 왕정은 민생 대책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더구나 별다른 소득도 없었던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한 이후 프랑스 정부는 완전히 파산했다. 여기에 재무장관 네케르가 사임하면서 프랑스 왕실의 분식회계를 폭로하자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다.

프랑스 재무장관이었던 자크 네케르 초상(사진= 위키백과)

프랑스 재무장관이었던 자크 네케르 초상(사진= 위키백과)


분노의 칼끝은 왕실을 향하고 있었지만 사실 왕실은 그렇게 돈을 많이 쓰진 않았다고 한다. 루이14세와 루이15세 때 지출하던 비용과 비교하면 아주 적은 액수만 사용했다.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가 이끌던 당시 왕실이 지출한 비용은 원래 왕실에 배정된 비용의 3% 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루이16세 초상(사진= 위키백과)

루이16세 초상(사진= 위키백과)


루이16세는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만들거나 시계 고치는 것이 취미일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왕비는 프랑스어도 제대로 못해서 혼자 별장에서 농사 짓는게 취미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선대 왕들과 왕비들처럼 엄청난 사치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대에 누적된 재정문제를 한꺼번에 뒤집어쓰게 되면서 루이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는 사치로 나라를 망친 왕과 왕비의 이미지로 남게됐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는 현대에도 루이16세와 당시 왕실에 대한 평가는 좋지않다. 갑자기 그의 시대에 밀려든 추위와 기상이변, 이전 임금들의 재정낭비 등을 갑자기 떠안은, 단순히 운이 없었던 임금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돈도 안썼던 것은 그의 미덕이지만 민생을 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 또한 없었다.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걸맞는 대책을 전혀 내놓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죄로 기억되는 것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