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임진년 그 사람들]⑨이여송, 이래저래 조선과 얽힌 요동의 명장

최종수정 2016.12.21 14:28 기사입력 2016.12.04 08:12

댓글쓰기

이여송 초상(사진=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이여송 초상(사진=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으로 파병 온 여러 명나라 장수 중 대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장수인 이여송(李如松) 장군. 원래 조상이 조선인 출신인데다 나중에 손자가 조선으로 망명왔고 후손들도 현재 우리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널리 알려진 장수다.

그의 집안은 원래 평안도에서 명나라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5대조인 이영(李英)은 평안도 초산 사람으로 살인죄를 쓰게 되어 국경을 건넜다고 한다. 그후 랴오둥(遼東) 일대에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으며 이여송의 아버지인 이성량(李成梁)이 요동총관이 된 후 자식들이 모두 명나라 변경을 지키는 장수가 되면서 군벌집안이 됐다.
이여송 뿐만 아니라 이여송의 형제인 이여백(李如柏), 이여정(李如楨), 이여장(李如樟), 이여매(李如梅) 등의 아들들과 일족(一族)의 이여재(李如梓), 이여오(李如梧), 이여계(李如桂), 이여남(李如楠) 등이 모두 무장(武將)으로 이름을 떨쳐 당시 명나라에서는 이가구호장(李家九虎將)이라고 불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이여송은 영하(寧夏)에서 벌어진 발배의 난(?拜之?)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전투가 끝나자마자 황제의 명을 받고 조선에 원군으로 출병했다. 4만3000여명에 이르는 원군을 이끌고 진격한 그는 평양성 수복, 한양 수복 등 굵직한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다. 그가 처음 압록강을 건널 때는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이 버선발로 마중했고, 곧바로 진격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장군이 겨울 내내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전세를 관망하며 미적대면서 좀처럼 남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기간동안 민가에서 약탈을 자행해 군량을 모으는 등 명군이 행패를 부리면서 조선 조정은 물론 민담에서도 악당으로 묘사된다.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공세로 나가기보다는 적당히 일본과 타협하여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재정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라 장기전이 계속되면 막대한 전비가 들어가고 그것은 곧 재정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를 기록한 징비록에서도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얼레빗보다 더 촘촘한 참빗" 이라고 비난할 정도다.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제발 진격을 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군량 문제로 이여송이 류성룡을 꾸짖자 그만 류성룡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여송도 이 꼴을 보고 민망하긴 했는지 부하 장수들에게 "너희들은 전에 나와 함께 서하를 정벌할 때도 여러 날 굶고도 참고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제 조선에 와서 며칠 군량이 없다고 벌써 돌아가자고 하냐?"며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명군만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명군은 발배의 난이 끝나자마자 재편성돼 급히 원병으로 오느라 제대로 보급체계를 갖추지도 못했고 조선에 오면 명나라처럼 은을 가지고 식량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자금을 들고 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화폐 유통이 거의 안되는 물물교환을 하는 나라였고 전쟁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군량은 물론 백성들이 당장 먹을 식량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전투에 필요한 군량이 모일 때가지 상당한 시일을 끌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듬해인 1593년, 명군은 본격적인 수복 작전을 개시한다. 이여송은 1만명의 조선군 지원과 함께 도합 5만병력으로 평양성을 포위, 일본군과 격돌했다. 이여송은 명군이 보유했던 모든 화포를 집중해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평양성의 일부 성채는 함락했으나 일본군은 남은 성채에 모여 방어를 강화하자 협상으로 포위망을 풀어주고 일본군은 철수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명 연합군은 일본군 1만8000명 중 1만2000명을 격멸하는 승리를 거뒀다.

이어 평양성이 탈환되자 선조와 조선 조정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고,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계속 추격하며 2주 후 개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기세가 등등해져 기병 수천기만 거느리고 한양 근처 벽제관까지 내려갔다가 반격에 나선 일본군에 크게 패했다. 자신의 직속부대인 기병대를 잃고 난 후 제대로 된 공세없이 버티다가 새로 원군으로 파병 온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에게 조선 주둔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본국에 돌아간 이후에는 요동총병으로 활약하다가 아직 임진왜란이 끝나기 전인 1598년 4월, 타타르의 토만(土蠻)이 쳐들어오자 정벌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죽은 뒤에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영원백(寧遠伯)으로 추증됐고 충렬(忠烈)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동생인 이여매(李如梅)에게 요동총병의 직위가 승계됐다.

그 후 그의 손자 이응인(李應仁)이 명청 교체기에 조선으로 피신해 망명한다. 이는 당시 이여송의 집안이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와 철천지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여송의 아버지 이성량은 요동총관으로 재직시 만주족들의 내분을 교묘히 이용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으로 이 지역을 통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탁시(塔克世)와 기오창가(覺昌安)를 오폭 사고를 위장해 살해했다.

누르하치는 1618년 명나라와 전쟁을 선포하며 전쟁명분으로 이른바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하는데 그 첫 번째 항목이 바로 이성량이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여송의 자손들은 청나라가 통치하게 된 중국에서는 살 수가 없는 상황이 됐다. 한편 이여송이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인 금씨(琴氏) 성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며 낳은 아들인 이천근(李天根)의 경우엔 청나라에서 명나라 유민 쇄환 요구가 오자 거제도에 숨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