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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⑧우키타 히데이에, 행주에서 임자 만난 일본군 총대장

최종수정 2016.12.21 14:29 기사입력 2016.11.2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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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타 히데이에 초상(사진=위키백과)

우키타 히데이에 초상(사진=위키백과)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보통 전체 국운을 걸고 해외 침략을 하는 대규모 전쟁의 총사령관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백전노장(百戰老將)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총 사령관은 참전 장수 중 나이도 가장 많았고 지략가로 유명한 6군 사령관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15만 대군을 이끈 총대장은 고작 스무살 약관의 청년이었다. 8군 사령관이기도 했던 그의 이름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조선 쪽 기록에서 우희다수가로 나오는 장수다. 1573년 생으로 임진왜란 당시 스무살의 아주 젊은 미남자였다.
사실 이 사람은 장수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인물이다. 키가 170cm가 넘어 당시로서는 장신에 미소년으로 유명했다고 하며 명문가 출신으로 무사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같은 학사들과 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군 총대장에 임명된 것은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자로 매우 총애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나이에 히데요시의 양자로 입적된다. 원래 그의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는 일본 비젠(備前)지역의 영주로 모략과 지략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히데이에가 고작 10살 일 때 병사했다. 나오이에는 주변의 적들로부터 가문과 아들을 지키기 위해 히데요시를 직접 불러 히데이에와 자신의 아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뒀다.

히데요시는 나오이에의 부인을 자신의 첩으로 삼고 히데이에는 자신의 양자로 삼았으며 토요토미의 성씨를 함께 하사하고 자신의 이름에 들어가있는 '秀(히데)'자도 이름에 넣어줬다. 히데이에는 이후 공식석상이나 사석에서 모두 토요토미 히데이에로 통했으며 그만큼 히데요시의 신뢰도 두터웠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나 전후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에도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끝까지 싸운다.
이런 사연많고 나이 어린 '낙하산'출신 총대장이었지만 성실하고 인정깊은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전투경험이 일천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특히 권율장군과의 전투에서 군사적 능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권율장군이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후 1만 병력을 몰고 임진년 12월 말 수원의 독산성(禿山城)으로 진군하자 당시 한양에 주둔 중이던 히데이에는 병사 2만명으로 독산성을 포위했다. 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고립시키려했으나 권율장군이 쌀로 말을 씻기는걸 보고 조선군 측이 물이 많은 것으로 착각하고 포위를 풀었다고 한다. 아직도 독산성의 세마대(洗馬臺)는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행주대첩에서는 권율장군에게 말 그대로 참패한다. 2300명 정도 병력으로 권율장군이 수비 중이던 행주산성(幸州山城)을 3만명의 대군으로 공격했으나 본인 스스로도 큰 부상을 입고 참패해 물러간다. 당시 히데이에는 행주성 병력의 적음을 우습게 여기고 병력을 축차 투입하거나 별다른 전략을 짜지 않고 일제 돌격작전을 폈다가 대패했다.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대포 등 각종 무기를 배치해놓고 일제사격을 시작했고 7부대로 나뉘어진 일본군은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화살이 다 떨어지자 조선군은 돌을 던지며 싸웠고 여기서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며 행주치마 전설이 시작됐다.

많은 희생 끝에 조선군 방어선이 뚫리려 할 때 경기수사가 화살과 보급품을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고 때마침 수십척의 조운선도 뒤따랏는데 이를 보고 히데이에는 수륙 합동작전을 벌일 것으로 착각하고 결국 퇴각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 군이 다시 남진하기 시작하고 권율장군도 파주로 군세를 옮겨 자리를 잡자 얼마 후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게 됐다.

이후에도 히데이에는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가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이 종결되면서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끄는 동군에 맞서 서군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해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싸웠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다행히 목숨은 건져서 하치죠지마(八丈島)란 섬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무려 50여년을 보낸 후 83세의 나이로 편안히 죽었다.

수많은 영웅호걸이 일어났다 사라진 전국시대를 보내고 임진왜란과 다시 일어난 내전까지 모두 거치고서도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인물로 남게됐다. 그의 후손들도 이 섬에서 평화롭게 가문을 이었으며 아직도 그 섬에서 생존한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주군이자 양아버지의 가문인 도요토미 가문을 비롯해 멸문된 수많은 가문들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일지도 모를 인물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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