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만 왈츠와 닥터만 설립자 겸 커피박물관장의 포부
"결혼 기념일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꼭 가고 싶은 커피전문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관장은 "최근 커피 업계에 많은 기업인, 의욕 있는 젊은이들이 뛰어들어 승승장구하기도 하지만 10년 이상 생존하는 훌륭한 커피하우스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가진 이는 드문 것 같다"며 아쉬움도 나타냈다.
박 관장은 '원두커피'라는 말이 낯설었던 1989년 홍대 앞에 커피전문점 '왈츠'를 설립한 우리나라 커피전문점 시대를 연 개척자이자 선구자다. 그가 경영하는 '왈츠와 닥터만’의 왈츠는 처음 커피사업을 시작했을 때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닥터만은 커피 닥터(박사)와 그의 이름 끝 글자(만)를 합성해 만들었다. 박 관장은 "가장 아름다운 커피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처음엔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다. 5년을 일하다 독립해 디자인 회사를 세웠다. 박 관장은 "디자인 일이 들쑥날쑥해 안정되고 고정된 수입이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디자인박람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편의점, 펜션, 파리바게트 등 장래 유망할 것 같은 업종이 눈에 들어왔고 그 가운데서도 유독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박 관장은 "처음 일본 커피하우스 왈츠의 문을 연 순간 저 앞에는 별천지가 열린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들이 커피를 만드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 저는 홀딱 반했다"고 회고했다.
박 관장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집을 지어 커피사업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1993년에 터를 잡고, 도로를 내고 허가를 받는 데 3년이 걸려 마침내 1996년 11월16일 '왈츠와 닥터만'의 문을 열었다. 2006년 8월엔 국내 최초의 커피박물관을 건물 2층에 개관했다. 커피박물관은 커피의 역사, 각국의 커피문화 등을 알려주고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커피막물관은 박 관장이 "제 인생에서 잘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첫째가 커피를 선택한 것이고 둘째가 박물관을 개관한 것"이라고 말할 만큼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이다.
왈츠와 닥터만은 올해로 만 스무 살 청년이 됐다. 박 관장은 그동안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면서 세계 곳곳의 좋은 커피와 커피밀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닥터만 금요음악회, 커피 역사 탐험대 출정, 커피관련 저술과 기고, 닥터만커피 교실운영 등 커피문화 확산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커피업계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굳어져 있을 만큼 그의 명성은 높다. 박 관장은 "100석 규모로 열리는 닥터만 금요음악회는 매주 금요일 마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청중들과 함께 펼치는 행사로 최근 536회가 열렸다"면서 "클래식 연주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고 꾸준히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자평했다.
박 관장은 요즘 재능기부 활동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자랄 수 있는 커피나무를 개발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그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문화예술교육 재능 나눔 사업에 문화예술 명예교사로서 참여해 커피로드를 주제로 아프리카, 아랍, 유럽, 아시아 그리고 한국에 이르는 커피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온실이 아닌 한국의 노지에서 자랄 수 있는 커피종자(나무) 개발에도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강원대에서 원예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박 관장은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지 130년이 지났고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우리는 커피를 마실 텐데 언제까지 커피를 수입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커피 종자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 관장은 "강원도 두메산골에서도 자랄 수 있는 커피 종자, 커피나무를 찾겠다"면서 "이 일은 유전학자와 식물생리학자, 정부 등이 혼연일체가 돼야 가능한 일이지만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욕을 다졌다.
박희준 편집위원 jacklon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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