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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좋은 담과 좋은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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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짝꿍과 책상 가운데에 금을 긋고 으르렁 댄 기억이 난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금을 살짝 넘어 온 지우개마저 칼로 벨 정도로 서로에게 사나워졌다. 다음 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외과의가 집도하듯 주머니칼을 들었다. 신중하게 자로 가운데를 정확하게 재고 일직선으로 깊숙한 금을 쭉~ 그은 다음 짝꿍에게 선포했다. '여기 넘어 오면 다 내 거야!' 가끔 금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지우개 정도는 네 것 내 것 안 가리고 나눠 쓰던 때로 돌아가고픈 마음도 들었지만 이미 깊게 파인 초등학교 4학년 마음의 골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만 그 금을 지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친구의 마음도 나처럼 불편했을 거라고 이제야 헤아려 보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 이젠 그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미국 동부의 작은 도시에서 한국학교 교장을 할 때 일이다. 이민 사회에서 생기는 자질구레한 문제를 자기 일처럼 나서 해결해 주던 인상 좋은 이 선생님. 분명 나보다 연배가 좀 높은 것 같은데 늘 깍듯이 존댓말로 나를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방에 갔다가(미국에도 노래방 있습니다!) 우연찮게 그가 고등학교 선배임을 알게 되었다. 노래를 부르기 전 이 노래는 내 고등학교 선배가 부른 무슨 노래라고 소개를 했는데 그 가수가 바로 이 선생님의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고 한다. 노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 선생님이 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너 몇 기냐? 짜식 이리 와 좀 앉아 봐라."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두어 번 더 만났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호감이 철철 넘치던 이 선생님과 왠지 서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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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s make good neighbours)'.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지금은 퇴직하신 엄정식 교수님이 들려준 말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담을 고치며(Mending Wall)'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란다. 내 식으로 거칠게 해석하면 좋은 담은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담일 것이다. 너무 강고해도(이건희 회장 집의 붉고 높은 담은 이웃을 아예 거부하는 담이다), 너무 부실해도 좋은 담은 아니다. 초등학교 짝꿍과 나 사이에 있던 강퍅하고 높은 담은 우리를 적대적인 이웃으로 갈라 놓았고, 이 선생님과 쌓았던 존중의 담은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실을 안 순간 와르르 무너져 결국 서먹한 이웃이 되고 말았다.

 최근 사드 배치를 밀어붙이는 정부와 이를 반대하는 성주군민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좋은 담과 좋은 이웃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본다. 외부세력을 운운하면서 성주군민의 반발을 지역이기주의로 몰아가는 주류 언론은 성주군 주위에 높은 담을 세우려고 한다. 성주를 고립시켜 다른 지역의 시민들을 적대적인 이웃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미 수 차례 분명히 밝혔듯이 성주군민의 목표는 '단지 성주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에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것이다. 정부가 성주와 칠곡 사이, 그리고 성주와 평택 사이에 담을 세우려 할 때 오히려 현명한 성주군민과 국민들은 사드 배치로 인해 한국과 중국, 한국과 북한 사이에 세워질 담의 높이와 그 담이 가져올 적대적 이웃의 탄생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사드 배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높고 강퍅한 담을 세우는 일이다. 반대로 한국과 미국 사이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군사적 담은 급격하게 무너질 것이다.
 시인 프로스트가 알려준 대로, 그리고 내 초등 짝꿍과의 파경과 고등학교 선배 이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좋은 이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담을 세워야 한다. 높인 담은 적을 만들고 무너진담은 도둑을 부를 뿐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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