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커다란 캔버스 위로 자유로운 붓질이 넘나든다. 점과 선과 면이 불규칙하게 찍히고 그어지고 이어진다. 널찍한 흰색 바탕 위로 녹색과 빨강, 노랑, 파랑색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춤을 춘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를 쥐고 마음 가는대로 그려낸 그림 같다. 형체를 설명할 길 없는 추상화. 그렇지만 보는 이에겐 무언가를 얘기하는 듯하다. 누가 보는가에 따라 그 스토리는 달라져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림과 노래'가 즐거운 작가 백현진(44)의 작품이다. 그는 20여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작업해 왔다. "솔직하게 살고 싶었다"는 작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일에 대해서도 그렇듯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솔직하냐고' 질문하며 살았다. 남의 의식보다는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탐구했고 그것을 그림과 노래로 풀어왔다. 그의 작업이 너무나 자유로운 이유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일에 숨통이 트였고 여유도 생겼다. "좀 더 어릴 적에는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설적인 인디밴드인 어어부 프로젝트의 보컬리스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루에 5시간 이상 붓질을 한다는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입으로 소리를 낸다. 미술과 음악 작업을 동시에 하는 순간이 많다. 입에서 흥얼거리는 소리는 작곡의 도구다. 작가는 또한 작업들이 완성됐다고 생각이 들 때까지 수개월을 공들인다. 그는 "'어떤 동물에게 도구로 인식되기 이전의 물질'이란 작품은 1년 정도를 붙잡고 있었다. 이리저리 매번 색을 칠하고, 수정하기도 하면서 끝났다 싶으면 그대로 둔다"며 "제목들은 그리려 했던 의미들을 적확하게 표현하려고 붙였지만, 사실 제목은 없어도 된다고 본다"고 했다.
그의 그림은 예측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우발적인 도상과 붓질, 현란한 색들이 화면을 구성한다. 작가가 직관을 쫓아 순간 그리기를 계속하는 반복 행위는 예술적 수행과 공허함 사이에 묘한 긴장을 연출한다. 그의 작업에는 작가만의 개성,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작가는 서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아트선재센터, 성곡미술관, 상해생현대미술관, 쾰른 미하엘 호어바흐 재단, 두산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가졌다. 그는 최근 방준석 음악감독과 함께 듀오 프로젝트 '방백'을 결성해 활동 중이다. 이번 전시 기간 동안 전시장에서는 매일 즉흥적으로 빚어내는 작가의 사운드 퍼포먼스 '면벽(Face the Wall)'이 함께 소개된다. 그는 영화에도 조연으로 여러 번 출연한 바 있다. 일년에 10일 정도 영화에 참여하고 있으며, "물감값 정도 버는 수준이지만, 최근에는 영화판에 소속감을 조금 느끼곤 하다"고 했다. 전시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PKM 갤러리. 02-734-9467~9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