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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아파트 경비원 "가장 힘든 건 극소수 입주민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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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 한 유명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 이모(53)가 분신을 시도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내 한 유명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 이모(53)가 분신을 시도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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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유제훈 기자] # "경비일 오래 하다보면 아파트 한 동에 '진상' 입주민들이 한 두명씩은 꼭 있다는 걸 알게돼요. 낙엽이 질 때면 바람이 불 때마다 '왜 빨리 청소 안 하느냐'고 닥달하시는 분도 있고, 차가 몰릴 때면 와서 '이 차좀 밀어라'라고 명령조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죠"(아파트 경비원 B씨)

지난 7일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명 아파트 단지에서 입주민의 폭언에 모욕감을 느낀 경비원 이모(53)씨가 분신을 시도해 중태에 빠진 가운데, 열악한 근무조건에 놓인 상황에서 일부 아파트 입주민들의 '악성' 민원까지 해결해야 하는 경비노동자들의 처지에 새삼 관심이 모이고 있다.
11일 오후 기자가 찾은 서울·수도권 일대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주민들의 안전과 생활을 책임지는 경비노동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통상 한 평 남짓한 좁은 경비실 안에는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잠시 쉬는 시간 무료함을 달랠 조그마한 라디오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이날 찾은 수도권 지역의 한 아파트 경비실. 이 경비실 역시 다른 경비실들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유독 수북히 쌓인 종이컵과 커피들이 보였다. 이 아파트 1년차 경비원 A(65)씨는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시스템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낮시간을 버틸 재간이 없다"며 "졸음이 올 때마다 한 두잔 씩 마시곤 한다"고 말했다.

그가 2인 1조로 24시간 근무를 하며 한달에 버는 돈은 고작 100만원~120만원 수준. 그나마 A씨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일자리를 찾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했다. 고작 100만원을 벌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매우 다양했다. 아파트 단지 청소, 화단 정리, 주차관리, 민원해결, 택배중개업무, 소방업무, 범죄예방순찰 등 줄잡아 10여가지에 달한다.
가장 힘든일로 A씨가 꼽은 일은 '민원'이었다. 입주민들의 각종 요구사항을 처리하는 일이다. 그는 "이중 주차 된 곳의 경우 젊은 분들이 와서 '차 밀어라'는 식으로 요구하시는 분들도 있고, 빨리 청소하라며 성화하시는 분도 있다"며 "힘들지만 나도 집에서는 아파트 입주자인 만큼 최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한다는 마음을 갖고 일한다"고 전했다.

오후에 찾은 수도권 지역의 또다른 아파트 경비실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벌써 6년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B(69)씨 역시 가장 힘든 일로 극소수 입주민들의 횡포를 꼽았다. 그는 "아파트 경비일을 오래 하다보면 한 동에 그런 '진상' 입주민이 한 두 명씩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며 "일하다 들어와 잠시 앉을 때 깜빡 졸기라도 하면 귀신 같이 알고 '왜 졸고있느냐'며 화를 내시는 분도 있고, 화단에 풀이라도 조금 자랄 참이면 '빨리 풀뽑아라'라며 채근하시는 분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곳의 근무환경 역시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B씨 역시 A씨 처럼 화장실은 한참 떨어진 상가나 관리사무소를 이용해야 했고, 식사는 집에서 가져온 찬 밥에 반찬을 데워먹는 정도에 그쳤다.

이야기가 조금 이어지자 B씨는 기자에게 일어설 것을 부탁했다. 그는 "이제 일어나셔야 한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걸 보고도 일 안하고 수다나 떤다고 민원을 넣거나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파트 경비원들이 처해있는 현실은 녹록치 않다. 실제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감시·단속직 노령노동자 인권 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감시·단속직 노인노동자 중 95.4%는 계약직 등 비정규직인 것으로 조사됐다. 근무 시간 역시 아파트 경비원은 주당 61.8시간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경비노동자들은 2인1조로 24시간 근무를 이어 가는 탓에 이같은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임금수준은 최저임금 노동자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근로기준법 상 감시 관련 근로자는 최저임금의 90%까지만 지급해도 된다는 규정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용노동부에서는 내년부터 경비노동자들도 최저임금의 100%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추진중이지만, 현장에서는 이 때문에 오히려 근로계약서를 다시쓰게 하는 등 다양한 '꼼수'들이 횡행하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에 처한 경비근로자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일부 입주민 등의 횡포다. 국가인권위조사에서 언어·정신적 폭력 경험을 묻는 질문에 전체 55세 이상 감시·단속직 근로자 중 32.5%가 '있다'고 답했다. 신체적 폭력을 당했다는 이들도 5% 수준에 이르렀다. 압구정동 아파트 경비노동자 이모(53)씨의 비극적인 분신시도는 어떤 면에서 '예고된 참사'와 다름 없었던 셈이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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