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25명의 왕들의 평균 수명은 총 46.1세에 불과했다. 열 여섯 살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을 제외하면 평균 47.3세로 평균치가 조금 높아진다. 현재 기대수명 78세(남자평균)에 비하면 지극히 짧은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왕들의 사인(死因)으로는 중풍, 폐렴, 당뇨, 복상사, 매독, 출혈사, 치매 등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또한 피부 염증 질환의 하나인 '종기'는 왕들 중 최소 12명이 앓았던 병으로, 오랜 기간 고통 속에 빠뜨렸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조선의 의료 역사가 '종기와의 치열한 싸움'이라고 할 정도다. 최고의 부와 권위를 가졌던 조선 왕실 역시 죽음과 질병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실이 어떻게 병과 싸워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최근 개막한 '조선왕실의 생로병사 - 질병에 맞서다'란 제목의 전시다. 이 전시는 고궁박물관과 한독의약박물관이 공동 기획했다. 올해 개관 50주년을 맞은 한독의약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박물관이자 기업박물관으로 1964년 창업주 고(故) 김신권 명예회장이 한독(옛 한독약품)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박물관이다.
또 1800년 정조가 쓴 편지글에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앓았던 질병을 보여주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그동안 격열(膈熱)로 치증(눈곱이 많이 끼는 증상)이 있어 연달아 양료(凉料, 약)를 쓰고 있으나 치은(이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살)과 이근(耳根, 귓바퀴가 뺨에 맞붙은 부분)의 통증이 한꺼번에 있다가 며칠 전부터 조금 덜합니다." 여기서 격열이란 음식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못하거나, 넘어가도 위에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이내 토하는 병증을 뜻한다. 정조는 이어 의술이 뛰어난 정계상이라는 인물을 언급하며, '8000냥짜리 높은 어른'이라 치켜세우기도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역린'에서의 카리스마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병고에 시달리는 정조의 모습이다.
전시장 내에는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65세를 맞아 자신의 시력을 시험하기 위해 글씨를 새긴 석판들이 비치돼 있다. '기년시안(耆年試眼, 늙은이가 눈을 시험하다)'이라고 쓰여진 판 옆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와 그 존속연수를 깨알같이 새긴 또 다른 판이 있다.
◆의학에 해박했던 왕들 = 이 같은 유물과 기록들은 조선의 왕들이 의학에 꽤 해박했음을 보여준다. 의학은 조선사회 지배층의 필수지식이었다. 국가 전체로 보자면 신료들은 군주의 건강을 살필 수 있어야 했고, 사대부는 집안에서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식들의 질병을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최고 권력자인 국왕은 제도적으로 의료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었다. '의방유취'와 같은 다양한 관찬의서들이 국왕의 명을 받들어 조선시대 내내 편찬됐으며 국왕은 전국에서 공납되는 약재를 납약(우황청심환과 같은 환약) 지급이나 분급의 형식을 통해 신료들과 각 지방에 나눠주기도 했다.
◆조선왕실 '생로병사' 유물 한자리= 이번 전시에는 질병, 의학과 함께 출생과 양육과 관련한 왕실 유물들이 모아져 있다. 사도세자의 양육과정을 기록한 '경모궁보양청일기', 순종이 왕세자가 천연두에서 완쾌한 것을 축하하며 연회를 베푸는 의식을 담은 그림 병풍, 왕실 후손이 태어난 후 태반과 탯줄을 보관한 태항아리 등이다. 또 개인의 생사를 좌지우지했던 왕실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약과 관련한 각종 독약, 반대로 왕실 내부의 독살을 막기 위해 주둥이에 은 자물쇠를 부착한 주전자 등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국내 몇 권 남아있지 않은 초기 동의보감, 개화기에 들어온 근대 의료기 등도 비치돼 있다. 오는 9월 14일까지. 02-3701-75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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