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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의 입술속 도화향기가(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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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6)

[千日野話]두향의 입술속 도화향기가(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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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지만, 거기엔 미인의 절개와 고독한 자존심도 서려있는 것이겠지요. 눈 속에 피어 뭇꽃에 섞이지 않는 고고함을 보여주는 일도 가상하지만, 다른 꽃들이 모두 지나간 뒤 문득 피어나 도도한 미색을 돋우는 모양도 참으로 잊을 수 없었다오."

"설중매도 아름답지만 삼월의 춘매 또한 고혹(蠱惑)의 자태를 지니고 있지요. 저는 나으리가 4년 전에 봄을 노래한 '감춘(感春)'이란 시도 잊을 수 없습니다. 벚꽃과 자두꽃에 대해서 참으로 인상적으로 그리셨지요. 紅櫻香雪飄 縞李銀海飜(홍앵향설표 호리은해번). 붉은 벚꽃은 향기를 담은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흰 오얏꽃은 은물결 바다가 뒤집히는 것 같도다."

"꽃들이 지닌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어찌 폄하하거나 쉽게 매도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스스로의 천성으로 있는 힘을 다해 피워 올리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뭇꽃의 소란함을 피하여 고고히 피는 매화를 사랑한다 하여, 그것이 어찌 벚꽃이나 오얏꽃을 멀리하는 마음이 되겠습니까. 내가 더욱 깊이 사랑하는 것은 매화의 정신이며 매화의 영혼일 뿐, 꽃이 지닌 무구한 천성은 어느 것이나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존재라 할 수 있지 않을지요."
"나으리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솟아나옵니다. 도수매가 벙글어 매달려 있는 동안, 그 귀한 순간을 지상(紙上)에나마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런 욕심에 소녀가 둔한 붓을 움직여 묵매(墨梅)를 그려 담았지요. 가히 어디도 내놓기 부끄러운 졸작이오나, 나으리에게 꽃 진 뒤에도 향기를 남겨드릴 수 있을까 하여 바치는 선물이니 가상하게 여겨 받아주소서."

두향은 품 안에서 '묵매도' 일 점을 꺼내 펼친다.

"오오!"
종이 위에 피어난 먹빛의 매화가 붉은색, 푸른색을 그대로 띠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황이 소리쳤다. "참으로 놀라운 솜씨가 아니던가. 매화를 속속들이 사랑하는 육안과 심안(心眼)이 아니고는 이렇게 생생하면서도 향기롭게 그릴 수 없었을 것이오. 사랑이란 것이, 대상을 품으로 안아주고 병 앓듯 앓아주고, 그 내면까지 알아주는 것이라 하더니, 이 그림이 정녕 그러하지 않소. 기굴(奇?)하고 고색창연한 줄기에서 어여쁘고 생기 발랄한 꽃송이가 돋아나니, 가히 '향기를 듣는 듯(聞香)'하도다. 과연 두향이로다."

"나으리의 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이 꽃을 내 진정 오래 마음에 품고 싶도다."
"그러하시다면 묵매에 두시는 정에 편승하여 두향도 잠시 나으리 품에 들면 어떠하올지요?"
"아아, 두향아. 그대가 나의 마음을 이미 읽었구나. 이리 오너라."
"예에."

바스락거리는 치마소리. 작은 몸뚱이 하나가 이황의 가슴 속으로 어린 새처럼 파고든다.
숨소리 새근거리는 두향의 입술을, 급한 입술이 찾는다. 따뜻하고 서럽고 도톰한 것이 입술에 놀란 듯 닿으며 살며시 눌린다. 숨결이 겹쳐지면서 포옹이 깊어진다. 여인의 입술이 열릴 때 하얀 치아 사이로 도화향기가 전해져온다.

"이 도화를 어떻게 하면 좋으랴?"
퇴계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때 두향이 말한다.
"평양에 11세 기생이 이런 시를 지었다 하더이다. 미인하당거(美人下堂去) 함소절요도(含笑折夭桃). 미인이 내당 아래로 내려가, 미소를 머금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따네."
퇴계가 웃었다. "그 다음 구절은 무엇이더뇨?"
"부지섬수단(不知纖手短) 환매도지고(還罵桃枝高). 제 어린 팔이 짧은 줄 모르고, 도화 가지 너무 높다 되레 욕하네."
"핫핫핫. 내가 어린 기생이고 그대가 도화렷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제 어린 마음이 큰 어른을 모셨기에 늘 망설이고 두려워해왔사옵니다."
"이렇든 저렇든 오늘은 네 복숭아 꽃밭으로 들어가야겠구나."
"그러하시다면 저도 도화 가지 하나를 도수매처럼 늘어뜨려야겠사옵…."

다시 들이닥친 접문(接吻) 때문에 두향의 말이 끊어졌다. 대신 봉밀(蜂蜜)같이 달콤한 정적이 창밖의 빗소리와 함께 방안을 가득 채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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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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