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퇴계의 사랑 두향(54)
공서가 말했다.
"그렇군요. 박눌생이 단양 사인암에 와서 저 글씨를 새겼다면, 이곳이 자신이 몸을 숨길 장소로 알맞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깨끗한 뜻을 간직하며 학문을 정진할 수 있는 은둔처. 바로 우탁선생이 뜻을 둔 그 경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곳 바위에 새긴 저 바둑판과 장기판은 신선이 놀던 자취일까요, 아니면 옛사람이 노닐던 흔적일지요."
두향이 묻자, 공서가 말했다.
"혁추라 하심은…."
두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공서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아, 농담이었소. 혁추는 '맹자'에 나오는 바둑의 고수로 전국(戰國)시대 사람입니다. 혁추가 바둑을 가르쳐도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원리를 터득할 수 없다고 맹자는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한곳에 마음을 집중하여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퇴계도 웃으며 말했다.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에 갔을 때,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합니다. 눈같이 흰 눈썹의 노인이 흰 돌을 쥐고 칠흑 같은 검은 눈썹의 노인이 검은 돌을 쥐고 있었답니다. 흰 눈썹은 바둑판을 꿰뚫을 듯 노려보며 성난 말이나 굶주린 매처럼 덤벼들어 부딪히고 날렵하게 물러났지요. 그런데 검은 눈썹은 눈을 감은 채 느릿느릿 대응을 하고 있었다오. 왕자(안평대군)가 판세를 들여다보니, 검은 눈썹이 거의 지고 있었다 합니다. 그때 문득 검은 눈썹이 말을 꺼냈습니다. '내 늙은 데다 눈마저 어두우니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두는 것이 어떠하겠소?' 그러자 흰 눈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찌 선기(仙碁ㆍ신선바둑)에 이틀간 두는 일이 있겠소이까. 이미 다 굳어져 가는 형국이니 몇 수만 더하면 될 듯하옵니다만." 검은 눈썹은 잠깐 눈을 뜨고는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눈을 감으면서 '무릇 바둑이란 집중하면 뚫리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어찌 다 이겼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돌을 다시 들었지요. 그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묘수를 두었는데 마치 흐르는 물을 끊고 달리는 길을 베어내는 듯 무섭고 매서웠다 합니다. 검은 눈썹은 몇 수만에 판세를 바꿔 결국 이겨내더랍니다."
"호오!"
공서가 감탄했다.
"왕자는, 판이 끝난 뒤 검은 눈썹 노인이 한 말이 귀에 남았다 하였습니다."
"무슨 말을 하였는지요?"
"바둑을 조심스럽게 두는 것은, 잘 두는 곳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 못 두는 것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호오, 대단한 고수의 경지입니다."
"저 바위 바둑판을 보니 검은 눈썹 노인이 와서 앉아있는 듯합니다."
두향이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당나라 왕적신은 어느 여관에서 옆방에서 나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가만히 들어보니,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고는 바둑판도 돌도 없이 바둑을 두고 있더랍니다. 그 바둑 대화를 들으니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하더이다. 며느리가 돌 하나를 자시(子時)에 두고 축시(丑時)가 되어서야 시어머니 바둑 두는 소리가 들렸는데, 상대를 재촉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바둑 두는 걸 듣느라 왕적신도 꼬박 밤을 새웠답니다."
공서의 말에 퇴계가 말했다.
"그야말로 허허(虛虛)바둑이로군요. 경계가 툭 터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대화가 한참 무르익어갈 때, 이지번 일행이 도착했다. 퇴계는 반가이 그들을 맞았다. 이지번과 이지함, 이지번의 어린 아들(당시 10세) 이산해, 그리고 삿갓을 쓴 한 여인이 있었다.
"그대가 산해(山海)로구나. 산같이 우뚝하고 바다같이 광활한 기풍을 이름에서부터 지녔으니, 구옹(龜翁)의 뜻이 어떠한지 알겠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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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의 '退', 한 글자의 비밀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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