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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의 '退', 한 글자의 비밀(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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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53)
[千日野話]퇴계의 '退', 한 글자의 비밀(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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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가 말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즐긴다니 놀라운 일이외다. 사인암에 앉아서 고려의 역동선생이 보신 풍경을 한번 그윽하게 즐겨봅시다. 두향. 그래줄 수 있겠지요?" 그녀는 거문고를 품에 안는다.
"알겠습니다. 공서어른. 눈앞의 풍경과 시 속의 풍경이 서로 경쟁을 하는데, 제 어설픈 현가(絃歌)가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사옵니다."

"이슬 머금은 단풍잎 붉게 땅 위에 떨어지며
바위 연못엔 바람이 일어 푸른 하늘을 흔드네
숲 사이엔 숨겨진 채 환한 외딴 마을이 멀리 있고
구름 밖엔 들쑥날쑥 먼 바위굴이 이어지네

楓葉露乘紅墜地 石潭風動碧搖天(풍엽로승홍타지 석담풍동벽요천)
林間隱暎孤村逈 雲外參差遠岫連(임간은영고촌형 운외참치원수련)"
"캬아. 참으로 절창이오. 시도 절창이고 그 시를 얹은 노래도 절창이오."

공서가 외쳤다. 공서의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이, 세 사람은 시 속의 풍경이 현실 풍경을 이기는 듯한 기분을 함께 느꼈다. 눈으로 보는 풍경보다 언어에 얹힌 세밀하고 생생한 풍경이 더욱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백여 년 전의 시인이 마치 옆에 있는 듯하다. 이슬의 무게를 못 견뎌 떨어지는 단풍, 또 고요한 바위 연못에 바람이 부니 수면에 비친 하늘이 흔들리는 모습. 숲 사이로 숨겨진 채 어른거리는 마을이 멀어 보이는 것. 구름 밖에 먼 봉우리가 둘쑥날쑥 이어진 것. 이것은 어느 가을 바로 이 자리에서 직접 보지 않으면 묘사할 수 없는 실감 나는 미묘한 소묘가 아니던가.

누벽 한 곳에는 卓爾弗群 確乎不拔(탁이불군 확호불발)이라 새긴 각자가 있었다. 공서가 풀이했다.

"뛰어나도다,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로다, 단단하도다, 뽑을 수가 없도다."

두향이 물었다.

"저건 바위를 말함일까요?"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바위를 통해 인격과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저 글씨가 역동선생의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소."(혹자는 영조 때 단양군수를 지낸 조정세의 글씨로 추정하는 이도 있으나, 이 또한 짐작일 뿐이다)

"탁(卓)은 창조적인 역동성을 말하는 것이고, 확(確)은 내실과 실천적인 의지를 말하는 것이니, 저 여덟 글자가 나라를 살릴 인재가 갖춰야 할 큰 미덕이 아닐까 싶소이다."

퇴계가 나직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 인재를 알아보고 키워내고 적재적소에 기용할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는 나라가 융성할 것입니다."

공서가 맞장구를 쳤다.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겨 서벽정 북쪽 암벽에 쓰인 전서체의 대자(大字) 글씨에 머물렀다. 두향이 물었다.

"'퇴장(退藏)'이라고 쓴 저 글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공서가 풀었다.

"물러나 감춘다는 뜻이니, '출(出ㆍ벼슬하여 세상에 나옴)'이 중요하듯, '퇴(退ㆍ세상에서 물러남)' 또한 가치있음을 새겨놓은 것이 아니겠소이까?"

"세상이 어지럽고 나라에 도(道)가 행해지지 않을 때, 물러나 때를 기다리며 스스로를 닦는 태도를 말함입니까?"

"바로 그러하오."

"저 글씨를 쓴 사람으로 보이는 운수(雲?)는 누구이옵니까?"

공서가 머뭇거렸다.

"구름 늙은이라…. 참으로 멋진 호인데,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소이다."

퇴계가 문득 말했다.

"아마도 세종 때 참판을 지낸 박눌생(朴訥生)이 아닐까 하오. 고려 말에 태어난 그는 조선이 출범하였을 때 벼슬의 꿈을 접고 은둔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때 무렵에 쓴 것이 아닐까 싶네만. 물론, 나중에 그는 치세(治世)를 깨닫고 마침내 '출(出)'을 택했을 것입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사인암엔 고려의 천재가 있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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