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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열전]'적벽가' 계승자 송순섭의 소리인생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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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사진제공/한국문화재보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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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대화는 차라리 한편의 공연 같다. 마치 얘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 창극을 펼친 듯 낯선 세상 얘기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간혹 시조 한토막을 읆조리기도 하면 옛 사람의 정취에 흠뻑 취한다.

슬픈 일화를 전할 때는 살짝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어느 덧 일흔 여덟, 얘기 도중 판소리 한대목을 읊을 땐 연습실 전체가 부르르 떨릴 지경이다. 여전히 힘 차고 막힘이 없다. 어느 한 시절이든 지나온 대목을 한 구석도 주저함 없이 얘기한다. 중절모와 두루마기를 곱게 입은 외양새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포근할 정도로 친밀하다. 그는 힘들고 고단한 시절, 소리 인연으로 맺은 사람들 때문에 지금껏 무대를 지킬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운산(雲山) 송순섭 선생(사진)은 정통 동편제 계승자다. 스물 두살 공대일 선생 문하생으로 판소리계에 입문했다. 당시 소리꾼들이 너댓살부터 시작하던 것에 비해 매우 늦은 편이다. 집안에는 소리 내력도 없다. 소리를 한다고 했을 땐 주변의 반대가 여간 심하지 않았다.

"집안어른들이 말렸어. 망한다고. 미천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그것도 장남이 부모 모실 생각도 않고, 허망한 짓으로 인생을 탕진할거냐며 야단였지. 어머니만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거라 격려해 줬어. 타고난 팔자는 어쩔 수 없었던 게지."

그는 독립할 나이가 돼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광주로 올라왔지만 일자리가 없어 한동안 배회하며 지냈다. 그때 자주 가던 곳이 광주공원, 공원 한편엔 '호남국악원'이 자리하고 있어 날마다 계단에 앉아 소리를 들으며 지낼 수 있었다. 그는 왜 소리에 이끌렸는 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여러 달 그런 모습을 지켜본 공대일 선생은 그에게 "소리를 참 좋아하나본데 한번 배워볼테냐"고 권유한 것이 소리인생의 시작이다. 공 선생은 돈이 없어 배울 처지가 안 되는 그를 데려다 '홍보가'와 북을 가르쳐 줬다. 공대일은 '곱추춤'의 명인 공옥진 여사의 부친으로 당시 그의 휘하에는 임방울, 김명환, 성원목, 백남희 등 이미 명인,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 수두룩했다.

"공 선생 문하에 엄마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배운 이들이 많았지. 그러다가 김준섭 선생과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이태동안 소리 공부를 했지. 득음을 해보겠다고 산속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도 질렀어. 득음한 건지는 몰라도 그제서야 '토막소리꾼'은 된 듯 하등마."

그는 약장수 밑에서 북을 쳐주며 장바닥을 흘러 다니면서도 소리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전남 영암의 한 전파사에서 흘러 나오는 '흥보가' 소리에 취해 넋을 빼앗겼다. 가게에 뛰어 들어가 주인한테 '누가 부른 노래냐 ?"고 묻자 말 없이 레코드판 뒷면을 보여줬다. 적벽가 계승자이자 동편제의 대가인 박봉술 선생의 노래였다. 당시 박봉술의 판소리 음반이 나오면 백만장이 넘게 팔릴 정도로 유명했다. 박봉술의 명성은 오늘날 가왕 조용필급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마침 광주에 와 있던 박봉술 선생에게 찾아가 무작정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곤 박 선생을 따라 63년 부산에 정착, 비로소 동편제 소리를 본격적으로 사사받게 됐다. 판소리는 유파별로 창법, 기교, 정조가 달라 중고제, 서편제, 동편제로 구분한다. 동·서편제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며 동편제는 남원, 운봉, 구례, 순창, 흥덕에서 불리워진 소리다.

특별히 기교를 부리지 않고 소리꾼의 풍부한 성량으로 쭉쭉 뻗는 우렁찬 소리가 매력이다. 반면 서편제는 섬진강 서편인 보성, 나주, 목포 등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소리다. 가공과 기교와 수식을 가미해 소리하는 유파다. 선천적으로 풍부한 음량을 타고 나지 않았더라도 절묘한 기교로 템포를 늘이거나 감정을 더 살려 심금을 울리는 특징이 있다. 발림도 풍부하고 연기적인 측면도 더해져 있다.

"소리꾼이 되려면 반드시 '득음'을 거쳐야해. 소리를 얻는다는 뜻이지. 득음 과정 없이는 명창이 될 수 없어. 득음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달라. 폭포나 동굴, 깊은 산중에서 고된 수련을 통해 소리를 얻기도 하지. 득음해야 비로소 세상에 나와 소리를 할 수 있지."

박봉술에게서 무려 7년간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를 배웠다. 판소리는 모두 다섯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다섯 마당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춘향가다. 판소리는 유파에 따라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 등으로 구분한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조선 숙종 때 처음으로 독립된 예술 형태로 발전해 정조, 순조 재위 시기에 8 명창이 등장, 판소리 예술이 꽃피웠다.

"공대일 선생한테 서편제인 흥보가를, 다시 김준섭 선생에게서는 심청가와 수궁가를, 박봉술 선생에게서는 판소리 세마당을 배웠어. 덕분에 서편제, 동편제를 두루 경험할 수 있었지. 2002년 인간문화재로 선정됐는데 그저 '적벽가' 동편제 계승자라는 명목으로 그리된 것이지. 꼭 동편제, 서편제하고 나눌 것은 못 돼. 소리를 하다 보면 다 특색 있고 맛이 다르지."

69년 박봉술 선생이 서울로 떠나고 홀로 부산에 남겨지면서 본격적으로 소리판에 뛰어 들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매주 한번씩 서울을 오가며 소리 공부는 계속해 나갔다. 그는 72년 첫 공연으로 '열사 유관순 판소리 창작극'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관청에서 공연허가가 나질 않았다. 한일국교정상화돼 관계 회복에 나선 상황에서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이유였다. 하는 수 없어 허가 받지 않은 채 무대를 열었다. 그의 나이 마흔에서다.

"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뤘어. 다들 놀랐어. 직접 대본을 쓰고, 곡을 만들어 첫 작품을 올려 성공한거지. 부산에서 판소리극이 성황을 이루고 TV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나서자 관청도 손을 들었지. 그동안 냉차, 호떡 팔며 살아온 인생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었어. 나이 마흔 넘어서야 소리 인생이 보이기 시작한거지. 그렇다고 고생이 끝난건 아니야."

그리고 77년 국악협회 부산지부 창립에 나섰다. 돈이 없어 화가들한테 그림을 얻어다 부산호텔에서 전시를 열었다. 당시 김지태 전 부일장학회장이 기부한 협회 창립기금 1000만원, 그림 판 돈 2000만원을 더해 사무실을 열고 본격 창작에 돌입했다. 그림을 내준 사람들 중에는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화백도 있다. 남농은 이후에도 송 선생이 힘들 때마다 말 없이 작품을 내어주던 분이다. 송 선생은 "남농을 찾아가 '선생님 점심이나 모시려고 왔습니다'하면 그 분은 '예끼 이 사람아. 밥은 여기서 나하고 먹고, 그림 몇 점 들고 가"하곤 했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78년 부산예술제 창립 시에는 '흑의장군 정발' 판소리 창작극을 올렸다. 당시 시민회관 앞에 사람들이 몰려 사고가 발생, 수십명이 다쳐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출연자들은 물론 부산 예총회장까지 환자들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야할 지경였다. 어쨌든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만큼 문화예술에 목말랐다는거지. 힘든 세상, 싸워 이기는 선조들의 얘기를 들으면 힘이 나기도 했지만 판소리란 게 원래 시름을 달래주고 한 맺힌 가슴을 풀어주기도 해. 우리 소리를 들으며 고된 삶을 치유받고 싶어 몰려 들었던 거야."

그렇게 만들어진 창작극을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도 하고, 간혹 판소리 무대에 올라 적벽가 등 판소리 완창을 펼치기도 했다. 완창무대는 소리꾼들에게 가장 두려워하고 피말리는 무서운 자리다. 완창 무대에서는 모든 내공과 기량을 쏟아 몇시간동안 판소리 한마당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왠만한 명창이라도 각고의 수련과 준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어 80년에는 국악과 관현악을 결합한 새로운 시도를 펼쳤다. '안중근 판소리 창작극'이며, 부산 충렬사 제례악도 새로 쓰기도 했다. 이후 부산국악관현악단 창립, '판소리 창작극 '선화공주', '콩쥐팥쥐' 등을 내놓는 등 쉴새 없이 판소리와 국악의 일신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부산은 판소리계가 활기가 넘쳐 다른 지역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87년 부산에서의 소리 인생이 막을 내렸다. 부산에 판소리, 국악판이 성행하자 정치인들이 끼어들고, 다툼과 갈등, 자리싸움으로 얼룩졌다. 그가 앞장서서 해왔던 여러 국악사업과 활동에도 많은 상처가 생겼다. 그는 미련없이 광주로 돌아왔다. 그해 안중근, 유관순, 고경명 등에 대한 창작극을 새로 올리고 각종 후배 양성, 시립극단 설립 등에 나섰다.

그와 등졌던 부산시에서 그간의 공로를 인정, 떠난 지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부산시 문화상'을 수여하고, 적벽가 완충무대를 열어주기도 했다. 동서편을 아우르던 그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 그리고 정부도 2002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했다. 그는 대중에게 친근한 국악인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무대에서 청중과 소통, 심금을 울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힘이 넘쳐 군더더기 없는 소리는 동편제의 정통 계승자라는데 이견이 없다. 현재 운산판소리 연구원장과 한국전통예술진흥회 광주지부장, 서울대학교 국악과 강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 작업으로 1902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를 복원, 국악 상설공연장으로 만드는 작업에 힘을 모으고 있다.

"판소리는 민족이 어려울 때 사람들의 혼을 일깨우고, 막힌 기상을 뚫어주는 역할을 했다. 여러 영웅들을 창작극으로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한류의 근원도 실은 판소리속에 있다. 후손들이 이를 잘 지키고 발전시켜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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