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 편지]"청빈한 밥상 ?"..그 나르시즘에 빠진 봄날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휴일이다. 아내도 아이들도 외출하고 홀로 남았다. 오전이 다 갈 때까지 누워서 뒤척이다 겨우 텃밭에 나와 삽질을 시작했다. 일하는 동안 착한 이웃인 새들이 몰려와 노래하고 아기 손톱보다 작은 벚꽃잎이 분분히 날렸다. 숲의 나무들도 향내를 내뿜었다. 그새 삽질이 다섯 고랑을 넘어설 즈음 문득 옛 노승의 싯구가 떠오른다. "누각에 올라 금강경을 읽다가 잠들었더니 꽃잎 날라와 글자를 덮었네/작은 꽃잎 하나가 진리를 덮을 수 있을 줄이야" 참 오랫만에 맛 보는 즐거움이다.그러고 보면 우리는 늘 여유 없이 산다. 때로 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다. 불필요한 교제,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잦은 술자리, 폭음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기 일쑤다. 그리고 다음날 고춧가루 확 푼 콩나물국 한그릇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나와 또 일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사는게 '가장의 길'이라고 치부한 지 오래다. 그런 일상에서 잠시 해방돼 땀 흘리는 맛이 여간 만족스럽지 않다.
항상 봄을 맞는 기분은 안도감이다. "겨울, '조드'의 한 복판에서 모두들 잘 견디고 살아남았구나" '함께 겨울을 난' 생명들에게 은근한 동지감마저 솟구친다. 어느 덧 삽질은 100여평 되는 텃밭의 절반을 갈아엎을 무렵 배고픔이 슬슬 밀려왔다. 은근히 귀찮다. '누가 차려주는 사람 없나 ?' 한편으로는 공복이 신선하다. 평소 습관처럼 밥 먹었던 탓이다. 내 손은 커녕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을 그저 때가 돼서 몸속에 구겨넣어 왔다. 헌데 '적당히 일하고, 일한 다음에 밀려드는 배고픔'이라니...
내손으로 밥을 차려보자고 툭툭 털고 나선다. '무얼 먹을까 ?' 고민스러울 때 밭둑의 두릅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두릅순은 먹기에 적당히 자랐다. 주변에 취나물도 보이고, 머위도 꽤 피어올랐다. 나물들을 한 웅쿰씩 따다 데쳤다. 파릇한 색감이 식욕을 자극했다. '오늘은 산나물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자.' 나물을 찬물에 식혀 물기를 짠 다음 희고 널직한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된장 보새기와 밥 한 공기를 식탁에 놓자 아주 정갈한 점심상이다.
고추장에 나물을 찍어 뜨거운 밥에 얹자 입안에 군침이 돈다. 꿀 맛같은 점심이다. 쌉싸름한 두릅 향내며 그윽한 취나물에 취한다.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고 하는 건가 ? 불로장생을 꿈꾸는 황제의 음식이 부럽지 않다. 밥을 먹는 동안 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우고, 또 한 그릇을 더 먹었다. 밥을 다 먹고나니 싹 비워진 접시 하나, 밥 그릇 하나뿐 설겆이할 것도 없다.
'다음에도 이런 밥상을 자주 해야겠다.' 포만해지니 알 수 없는 나르시즘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적당량의 노동과 소박한 밥상, 그리고 나만의 청빈함 ! ㅋㅋ" 자연에서 내손으로 얻은 먹거리로 차린 밥상이 더 없이 만족스러웠다. 이쯤 되면 나의 나르시즘은 완벽하다. '이게 내가 누리는 호사려니 다음부터 기름지고 사치한 음식을 탐하지 말자.' 산나물과 간단한 밥 한그릇으로 맘껏 고양된 오후다. 또한 내 식의 진수성찬을 누리고 나선 더욱 청빈을 가꿔야겠다는 욕구로 가득찬다.
밥을 먹은 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늘 하루 밭갈이는 마치려고 서둘렀다.이윽고 저녁해가 잣나무골을 휘감았다. 곧 땅거미가 흑염소떼처럼 밀려들 형국이다. 헌데 몸이 이상했다.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다. 그래도 참고 삽질을 계속 했다. 마침내 저녁 노을이 숲을 덮칠 때쯤 속이 탈이 났다. '아 !' '내 몸은 한끼의 산나물도 견디질 못 한단 말인가 ?' 날마다 지방과 단백질을 탐닉하던 몸에게 절망한다.
나의 어설픈 나르시즘도 무너져 내렸다. '청빈이라고 ?' '내 머릿속을 채운 관념의 허망함을 몸은 결코 속이질 못 하는 구나.' 산나물 한 접시에 청빈이니 어쩌구 폼을 잡은 것이 웃길 노릇이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나를 변론하고는 싶다. 내 몸이 산나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내 잘못만은 아니다. 나도 과도한 지방 섭취의 피해자다. 어느 부분에서 지방 섭취는 강요당한 측면이 있다. 육식 없이는 비즈니스도 교제도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영업보고서는 지방이 만들어준 거나 마찬가지다. 또한 하루하루의 일상과 생존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지금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육식은 불가피하다. 지방을 탐닉하면서 죄의식마저 있다. 나는 늘 비만(지방)을 경멸한다. 그래놓고는 "늘상 기름 지고 사치한 음식을 탐닉하면서 소박한 밥상에 원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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