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잣나무골편지]이미 예정된 귀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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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비 멎자 집을 나섰다. 아들 녀석은 온갖 감언에도 방안에 틀어박혔다. '같이 걸으면 좋으련만. 정내미 없는 놈...' 걷는 동안 치통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이 나이에 사랑니라니..." 요즘 오른쪽 아래 사랑니가 더욱 자라고 있지만 치과에 가는 걸 미루는 중이다. 심지어는 관자놀이까지 통증이 올라와 오른편 얼굴 전체가 먹먹하다. 흡사 단단한 것에 부딪친 것처럼 감각이 사라졌다.


"지금 난 사랑에 앓고 있다. 스무살 청춘이다.푸하 !" 사랑니가 아직 자란다는게 신기했다. 신체의 일부가 소생하는 것같은 느낌이다. 왠지 달콤한 아픔이다. 치통이 심해질 때는 오른쪽 귀가 안 들릴 지경이다. 그래도 당분간 치통을 즐겨볼 참이다. 나는 장화처럼 길쭉하게 내려온 원적산 줄기의 비탈길을 따라 봉우리쪽으로 더 걸어 나갔다. 행복원과 중세의 성채같은 고급 전원주택을 지나고, 축산단지를 지날 때 먹구름이 밀려 들어 금방 다시 비를 뿌릴 태세다.

올해 초 축산단지는 구제역에 시달렸다. 길목마다 방역게이트가 놓이면서 석달이나 닫혀 있었다. 이번 산책길은 지난해 가을녘에 걸어본 이후 거의 일년만이다. 비탈길 끝에는 마을 사람들만이 아는 계곡이 숨어 있다. 울창한 잡목숲에 가려져 여름철에도 차가운 바람이 이는 곳이다. 난 예전에 그곳에서 낮잠과 독서를 즐겼고, 아이들도 물놀이하거나 가재를 잡으며 놀았던 추억이 있다. 계곡 입구까지 걷기로 했다. 왕복 이십여리쯤이다.


걷다보니 우중충한 구름이 사색을 몰고 왔다. '한없이 걷다가 찬 비를 만나 심장 가득한 유랑의 더운 피를 식혔으면...' 걷는다는 거 ! 탁닉한 스님은 '천천히 걸으며 마음의 평온을 구하라'고 가르친 바 있다. 걷는다고 할 때 '길'이란 '인생'혹은 '운명'이란 말과도 통한다. 단순히 인마와 운송수단이 지나다니는 공간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많은 표지판과 이정표를 따라 걷는데 익숙해져 있다. 휴대폰, 컴퓨터 등등 문명의 한복판을 걸었고, 금융 위기 등 수많은 난관을 겪어왔음에도 날마다 출퇴근을 반복하며 도전, 모험을 잃어가고 있다. 그건 여기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인 것 같다. 특별히 방향을 탐색하거나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볼 이유가 없던 셈이다.


숲 입구에 이르렀을 때 바람과 낙엽이 쏟아지는 소리가 무성하게 들렸다. 문득 '여기까지 무엇이 나를 이끌어 왔을까' 하는 상념에 빠졌다. 쑥부쟁이, 구절초, 노란 빛깔의 들국화, 억새꽃들이 바람결에 물결쳤다.


지독히 '걷기'에 중독된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전직 기자의 일화다. 그는 30여년간 '르 피가로' 등에서 정치부 기자, 사회ㆍ경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은퇴 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4년동안 1만2000km라는 거리를 걸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 우정을 배워 나갔다. 또한 은퇴자로서의 재활을 이뤘다. 눈 덮힌 파미르,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을 넘으며 옛 순례자의 길을 하염없이 걸어 인류의 오랜 문명과 조우했다. 그러면서도 "왜 걷는가 ?"라는 질문에 베르나르의 특별한 대답은 없다.


나는 그에게 있어 그토록 오랫동안 두 다리를 이용한 반복적인 몸놀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는 못 한다. 그러나 길이 생로병사의 과정속에서 단순히 '세월'이라는 시공간을 지나가는 '인생의 여정'만은 아닌게 분명하다해도 내겐 그가 그저 신기한 '걷기대마왕'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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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념에 빠진 채 이십여리의 여정이 모처럼 일탈로 물들었다. 만산홍엽을 이룬 가을 산같이...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도대체 운명이란 ? 관념적으로 "절대적인 힘에 의해 미래가 결정돼 있고 인간이 태어날 때 이미 변경될 수 없는 것"라고 설명하기는 한다. 그래서 받아들여야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간호사가 환자의 몸속에 주사바늘을 찔러넣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직자가 경전을 흔들며 입에 거품 물고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처럼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허면 내게도 거스를 수 없는게 있나 ?
그게 이미 귀환이 예정된 아주 작은 산책길을 그저 거스르지 않고 걷도록 돼 있는 것일까 ?
 
뒤돌아보면 산비탈의 억새들이 하염없이 손을 흔든다. '잘 가라. 안녕'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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