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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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5년 전 정동영 후보의 공약보다 못하지 않았고, 문재인 후보의 공약은 5년 전 권영길 후보의 공약과 같았다. 제가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때 냈던 서울시립대 반값등록금 등 여러 정책은 지금 박원순 시장이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무상보육 공약은 제가 내놓았던 공약보다 더 진보적이다."


노회찬 전 의원(진보정의당)이 최근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 복지정책의 정치적 흐름을 평가한 말로 보면 지난 5년간을 정확히 압축한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여ㆍ야와 보수ㆍ진보를 넘나들며 복지국가를 향해 공동의 정치적 의지를 모아왔다. 단기간에 전개된 그 과정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가는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걸고 무상급식을 막으려고 했던 게 엊그제 같다는 느낌이 그걸 웅변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뒤로는 집권세력 쪽에서 역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 자신이 당선인일 때부터 '증세없는 복지'를 대원칙으로 거듭 강조하고 나서면서 복지 확대의 외연이 좁혀졌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시키는 동시에 지급액을 소득과 재산에 따라 차등화하는 방안을 내놓는 뒷걸음질을 했다. 4대 중증질환에 대한 100% 건강보험 적용대상에서 간병비 등 비급여 항목을 제외한 것도 그렇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내정자와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어느 모로 보나 복지 확대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다.


급기야 박근혜 정부의 복지정책을 책임진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인사청문회 단계에서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에 대해 "선거 캠페인용이었으며, 정책은 다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본인이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발언이다.

박 대통령의 복지공약은 그 한 사람만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현 집권세력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그들의 창작물도 아니다. 그것은 짧게 잡아도 지난 5년간에 걸친 사회적 논의의 결과이자 선거에서 확인된 국민적 집단의지의 표현이다. 진 장관은 그것을 무시하고 조롱한 셈이니 '국가대역죄'까지는 모르겠으나 '국민대역죄'는 저지른 격이다. 내만복(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을 비롯한 4개 복지관련 시민단체가 그를 박 대통령과 함께 '복지공약 사기' 등의 죄목으로 검찰에 고발하는 행동으로 분노를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의 시대적 소명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칠게 단계론으로 말하면, 이전 시대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남긴 성과를 토대로 복지화를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박 대통령 자신도 선거 때와 그 후에 이런 맥락에 합치하는 소신을 간간이 내비친 바 있다. 그가 취임 후 발표한 국정과제에서 으뜸으로 제시한 '국민행복'도 내용상 '복지국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성장과 고용이 복지와 함께 선순환할 수 있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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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복지국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퇴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복지국가로 더 가까이 가는 방안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양극화로 인해 한계에 다다른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다시 끌어올리는 길이기도 하다. 복지국가로 가려면 연금과 건강보험의 확대ㆍ강화 외에도 고용ㆍ교육ㆍ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서 활기찬 시장과 든든한 국가가 상생하게 해야 한다.


독일 철학자 헤겔의 용어를 빌려 질문을 던져보자. 복지화를 지향하는 '이성의 간지(奸智)'에 박근혜 정부는 순방향의 도구가 될까, 역방향의 도구가 될까? 훗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박근혜 정부의 성격에 대한 역사적 규정이 될 것이다.


이주명 논설위원 c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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