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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당신은 ‘축구감독 김봉길’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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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당신은 ‘축구감독 김봉길’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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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K리그에는 16개 팀, 그리고 16명의 감독이 있다. 모두 캐릭터가 분명하다. 신태용은 거침없고 최용수는 호쾌하다. 박경훈은 부드럽고 안익수는 단호하다. 그 색깔은 이따금 ‘새마을 지도자(이흥실)’, ‘학범슨(김학범)’과 같은 별명으로도 드러난다. 딱 한 명, 인천 유나이티드의 새 감독 김봉길을 제외하면 그렇다. 처음이라 그런 탓도 있겠지만, 아직 그는 무색무취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올드 축구팬이라면 알겠지만 김봉길은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다. 물론 ‘스타’의 기준을 타이트하게 적용한다면 그 시기는 대학시절까지로 제한된다. 부평동중-부평고-연세대를 거치면서 그는 늘 랭킹 1위였다. ‘저격수’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는 황선홍 현 포항 감독과 더불어 유이(有二)하게 대표팀에 선발된 대학생 공격수였다.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연세대-고려대와 각급 프로팀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로에선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유공(부천SK의 전신)과 전남을 거치며 K리그 우승 1회, FA컵 우승 2회를 경험했고 나름 팀의 주축 공격수로 자리매김했지만 고정운, 차상해 등 동기들은 물론, 후배인 황선홍, 최용수 등에 밀려 국가대표나 K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냉정히 말하면 2인자였다.

지도자로서도 프로에서의 2인자 생활은 계속됐다. 2002년 백암종고로 고등 무대를 평정한 뒤 2005년 전남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2008년부터는 고향팀 인천에서 수석코치를 했다. 햇수로만 8년이다. 최용수 서울 감독이 수석코치 6년을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3년’이라고 표현했지만 거기에 2년을 더한 시간이었다. 그만의 이미지가 부각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랬던 그가 K리그에 시나브로 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 지난 4월 허정무 감독 사임 이후 한때 리그 최하위로까지 추락했던 인천의 구세주로 나섰다. 어려움도 있었다. 감독 대행 지휘봉을 잡은 뒤 10경기 동안 승리가 없었다. 초반 시행착오였다. 인천은 6월 23일 상주전에서 첫 승을 거두더니, 이내 부산과 서울 등 리그 상위팀을 잇따라 꺾으며 7경기 연속 무패(3승 4무)를 달렸다. 순위도 어느덧 12위까지 치솟았다. 인천을 만나는 팀들은 이제 긴장할 수밖에 없다.
최근 몇몇 팀들은 부진한 성적으로 구단 버스가 막히는 아픔을 겪었다. 인천도 같은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그 색깔은 반대다. 이긴 날 서포터스가 구단 버스를 앞을 막는다. 김봉길이 보고 싶다고. 그리고 감독이 나오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감독과 서포터스가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선수들은 앞 다퉈 ‘감독 대행’에서 대행이란 글자를 지워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선수와 지도자, 구단과 팬 사이에 드라마를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이란 평가다.

덕분에 그는 지난 16일 대행 꼬리표를 떼고 고향팀 인천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됐다. 새로운 시작이다. 김봉길 감독은 말한다.

“‘김봉길 축구’만의 색깔을 내겠다”

열혈 K리그 팬, 심지어는 인천 팬이라도 잘 몰랐던 김봉길 감독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18일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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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감독감은 아니야” 비난받은 ‘감독감’

정식 감독 선임을 축하한다. 인천, 요즘 잘 나간다. 7경기 연속 무패다. 첫 승 이후 상승세가 가파르다. 성적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초반 부진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팀이 됐다는 느낌이 든다. 비결이 뭔가?

4월에 허정무 감독님이 갑자기 그만두시면서 내가 지휘봉을 잡았다. 팀 분위기나 조금 어수선하다보니 동기 부여도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안 맞는 모습에 마음만 앞섰다. 선수들 마음 속 하고자하는 의지는 읽혔다. 다만 이기지 못하니까 자신감이 결여가 되어 있었고, 또 이상하리만치 종료 직전 버저비터를 맞고 지거나 비기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질책보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 생각했다. 경기도 많이 남아있었고, 주장 정인환과 두 베테랑 김남일-설기현이 선두에서 선수단을 이끌어 준 것도 큰 힘이었다. 팀이 후반기에는 올라올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중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최근 상주-부산-서울전 모두 후반 종료 직전 골을 넣고 이기고 있지 않나.

15일 서울전 3-2 역전승은 정말 대단했다. 아마 잊을 수 없는 경기가 될텐데.

그런 경기를 또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반전에 반전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팬들에겐 큰 선물이었겠지만 벤치에 있던 감독으로선 죽을 맛이었다. 아마 축구 감독은 제 명에 못 살거다(웃음). 2-2 상황에서 페널티킥 내줬을 땐 ‘아 저걸 허용하면 무너지겠구나’했는데, 유현이 막으면서 우리에게 한 번의 기회는 올 것이라 믿었다. 결국 승리하면서 내가 운이 참 좋구나 싶었다. 이튿날 정식 감독 선임되고 최용수 서울 감독에게서 축하 전화가 왔는데, 서울 이기고 감독 됐으니 전북-수원은 반드시 잡아줘야 한다고 협박(?)하더라. (웃음)

2010년 페트코비치 사임 직후 기간에도 감독 대행을 맡은 바 있다. 그 때부터 상주전 첫 승까지 무려 15경기 무승이었다.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했을 텐데, 항상 담담한 모습을 지켜왔던 것 같다.

(한숨을 쉰 뒤) 아…그거 아주 힘들었다. 한 번도 못이긴 감독 대행이었으니까. 속으로 정말 끙끙 앓았다. 그래도 선수들이 힘들어하는데 수장까지 위축되고 힘들어하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선수들에겐 늘 얘기했다. 난 괜찮다고.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 많이 부족하고 감독 경험도 없다. 대신 점차 좋아질 거고 시즌 끝날 때쯤엔 분명히 웃을 날이 올 거다”라고 얘기했다. 믿고 따라 와준 선수들이 정말 고맙다.

김봉길이란 축구인의 경력을 따져보면 재밌는 기록이 있다. 현역 시절부터 지도자 생활까지 거친 모든 팀에서 적어도 한 번씩은 우승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감독 대행 시절 이렇게 1승에 목마른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뭐랄까. 1승만 하게 해준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다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승도, 연승도 아니다. 딱 한번만 이겨봤으면. 이런 얘기 지금껏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던 건데, 여차하면 한 번도 못 이기고 이대로 감독 대행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겠다는 불안감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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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감독 대행 두 번 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래서 더 잘 알지 않겠나. 감독 대행이란 자리, 얼마나 힘든가? 제 3자로선 상상도 못할 정도일 것 같다.

2010년 처음 감독 대행 맡을 땐 시즌 중반에 갑자기 맡아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선수단 분위기도 안 좋았고, 구단주까지 바뀌면서 ‘감독이 바뀐다’ 내지는 ‘이미 내정이 되어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난 흔들리지 않았다. 핑계 댄다는 얘기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 대행이라는 자리 엄청난 스트레스다. 현실적 신변 변화는 없다. 지위도 코치 수준이고 봉급도 똑같다. 그런데 책임은 전부 내가 짊어져야 한다. 또 감독과 감독 대행은 선수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다. 대행은 임시직이다. 선수들도 “저 사람 저러다 곧 그만두겠지”란 생각, 안할 수 없다. 또 성적까지 안 좋으니 주변에서 “김봉길은 아직 감독감은 아니야”라는 자존심 상하는 얘기도 들려왔다. 누군가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난 팀의 수장이고, 그래서 항상 선수들에게 자신감 있어 보이려 했다. 항상 웃어야 하고…. 그렇게 3개월을 보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너무 힘들었다.(웃음)

첫 승 이후 설기현도 그러더라. “우리 감독님 정말 힘드셨을 텐데 한 번도 내색 안하시고, 정말 대단하다”라고. 김남일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김)남일이와 (설)기현이 모두 대선수고 고참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내 밑의 선수다. 본인들도 힘들 텐데 내가 그런 걸 내색할 순 없었다. 나는 무조건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늘 “난 괜찮으니 너희가 힘내라”라고 얘기했다. 이제 와서 털어놓는 얘기지만, 사실 무승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만 둬야 하나’ 싶었다. ‘이 자리에 계속 있는 게 내 욕심 아닐까? 이기적인 생각 아닐까? 팀을 위해선 내가 물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란 생각 정말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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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맡은 뒤 한 달 여 뒤에 스승의 날이 있었다. 그 때 선수들이 양복 한 벌을 선물했다고 들었다. 더불어 정인환-김남일-설기현 셋이서 함께 “선생님, 저희가 대행 꼬리표 떼어 드릴게요”라고 얘기했다던데.

정말…그 말 듣는데…(잠시 먼 곳을 보며). 지도자란 그런 것 같다. 선수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 그 마음을 전해 들었을 때 ‘아, 얘들이 그래도 조금은 나를 인정해주고 따라오려고 하는구나’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난 지도자 생활하면서 늘 트레이닝복만 입었다. 그런데 왜 선수들이 양복을 사줬겠나? 감독 대우 해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감독 대행 첫 경기였던 울산전 때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나갔더니 경기 끝나고 선수들이 코치들 통해 양복 입고 나오셨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스스로 좀 갈등했다. 내가 아직 대행이고 2연패까지 했는데 양복 입고 나타나면 주변에서 ‘어깨에 힘만 들어갔다’라고 안 좋은 얘기가 나올 것 같았다. 또 잘 안 입던 옷이라 어색하더라. 그래도 결국 그 양복 입고 첫 승했다.(웃음)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결국 6월 23일 상주와의 홈경기에서 경기 종료 30초 남겨놓고 설기현 결승골이 터지며 감격적 첫 승을 거뒀다. 그 때 기분은 정말 최고였겠다.


꿈꾸는 것 같더라. 골이 들어가고 곧바로 경기가 끝났는데, 난 정말 좋을 줄 알았는데 마냥 멍했다. 너무 감격적이다 보니 표현을 못했다. 그게 좀 후회스럽다. (웃음)

얘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김봉길이란 지도자가 추구하는 지향점이 보이는 것 같다.

팀 워크다. 좋은 선수가 많은 팀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처럼 시민구단이고 전력이 다소 떨어지는 팀은 무엇보다도 팀워크가 중요하다. 일례로 서울전 앞두고 기자들이 너무 강팀만나 걱정 되지 않냐고 묻더라. 물론 서울은 K리그 최고의 팀 가운데 하나다. 좋은 선수도 많고 리그 최소 실점 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보다 팀워크가 강한 팀이라 생각했고, 조직으로 승부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 서울을 상대로 세 골이나 넣고 역전승했다. 선수단 사이 신뢰와 인간적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적어도 내가 맡은 팀은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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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니폼니시와 허정무를 섞다

다른 15개 구단 감독을 보면 각자의 캐릭터가 확실히 떠오른다. 그런데 김봉길이란 지도자는 아직 뚜렷한 이미지가 없다. 무색무취에 가깝다랄까. 대행이란 위치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을 숨긴 것도 있을 듯싶다.

물론 대행이란 자리가 운신의 폭에 제한을 준 것도 있다. 또 개인적 성향 자체가 튀는 걸 싫어한다. 선수가 주인공이 되어야지…. 앞으로도 그럴 테니, 그게 내 캐릭터가 되지 않겠나(웃음). 내가 수석코치만 8년을 했다. K리그에도 그런 사람 많지 않다. 그러면서 여러 감독님을 모셨다. 장외룡, 페트코비치, 허정무 감독님, 그리고 현역시절엔 정병탁, 김정남, 박성화, 니폼니시 감독님. 선수 생활시절부터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어 일지도 틈틈이 기록하고 공부하고, 감독님들의 장단점을 곱씹었다. 훗날 감독이 됐을 때 그 장점만 모아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럼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선배 지도자는 누구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당연히 허정무 감독님이다. 선수 시절 감독님이시기도 했고, 코치 시절에도 전남-인천에서 모두 모셨다. 내가 이미 인천 코치였던 2010년에 감독으로 부임하셨을 땐 정말 반가웠다. 그 때 내게 “너하고 난 무슨 악연이 이렇게 기냐”고 웃으셨다. 얼마 전 감독직 사임하실 땐 내가 잘못 모신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프고 혼란스러웠다. ‘나는 책임이 없나? 나도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란 고민도 있었다. 사실 허 감독님 얘기는 늘 조심스럽다. 아직도 허 감독님 그늘에 있다고 비쳐질까봐.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스승에 대한 결례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내가 모셨던 감독님 중 허 감독님이 최고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무실 때까지 지독하리만치 축구만 생각하신다. 그건 정말 존경스럽고 배울 점이다.

니폼니시 전 유공 감독에 대한 영향도 많이 받았다던데.

사실 현역 시절 니폼니시 감독님 밑에 있던 시간은 반년 남짓에 불과했다. 그 뒤 계약 문제로 전남에 트레이드됐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감독님이 그 때 구단에 찾아가 왜 김봉길을 내보냈냐고 항의하셨단다. 1995시즌에 국가대표팀과 K리그 올스타 간 경기가 열렸는데, 니폼니시 감독님이 나를 올스타에 뽑아주셨다. 난 당시 전남 선수였는데도. 그 때 내게 ‘같이 운동하고 싶었다’라며 아쉬워하시더라. 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배울 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 특히 감독님은 선수들이 실수해도 절대 나쁜 얘기 안하셨다. 솔직히 프로선수라면 자기 실수 정도는 다 안다. 혼날 거란 것도 안다. 그런데 감독님은 늘 “그런 실수 개의치마라. 넌 더 잘할 수 있는 좋은 선수다”라고 격려만 주셨다. 이전 국내 지도자와는 다른 태도였다.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스스로 더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만회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갖게 됐다.

또 니폼니시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가 당시 한국 축구와는 상당히 다르지 않았나

그렇다.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5미터 패스와 50미터 패스 중 어느 쪽이 확률이 높겠냐. 당연히 짧은 패스가 높다. 확률 높은 패스를 해라”라고. 또 그 때까지 한국 선수들이 패스를 약하게 했다. 알다시피 당시 유공은 홈경기 때 그라운드에 항상 물을 뿌렸다. 속도감 있는 경기를 위해서. 그 자체가 정말 충격적이었다. 유공이 우승은 못했지만 윤정환이란 좋은 선수를 비롯해 정말 최고의 팀이었다. 내가 감독이 되면 그런 축구를 하고 싶었다. 여기에 허정무 감독님의 승부근성, 0-3으로 지고 있어도 물고 늘어지는 정신까지 가미하는 거다. 지금 인천의 축구가 그런 모습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니폼니시 감독과 허정무 감독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인가. 겉보기엔 ‘덕장’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또 아무리 ‘기가 센’ 선수들도 김봉길 감독 앞에선 꼼짝도 못한다고 하더라.

내가 감독 대행되고 얼마 안 지났을 때였다. 보통 훈련 때 선수들과 얘기를 많이 안하는데, 어느 날 훈련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화를 크게 냈다. 그러고 난 뒤 (김)남일이가 선수들 모아놓고 그랬다더라. “김봉길 선생님처럼 평소 말씀 안하시다 화내시는 분이 정말 무서운 분”이라고. 또 남일이는 내게 “허 감독님보다 더 어렵고 무섭다”고 했다. 내가 부드럽게 좋은 말만 해주다 화를 내면 진짜 화가 난거니까. 유하다고 선수들이 가볍게 보지는 않는다. (Q: 의외의 카리스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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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의 심리적 혹은 정서적 영역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것 같다.

페트코비치 감독님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다. 존경할게 참 많은 분인데, 그분이 하루는 내게 “미스터 김, 봐라. 훈련할 때 보면 우리 선수들 바르셀로나보다 잘 하지 않냐. 패스 게임, 정신, 체력 모두 강하다. 그런데 왜 경기장에서는 그게 안 나타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라고 하셨다. 몸이 너무 경직돼서 연습과 실전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큰 선수들은 연습은 설렁설렁해도 경기에선 본래 모습이 나온다. 그 땐 나도 답을 못 드렸다. 한국 선수들 정신력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기술은 조금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연습할 때는 훌륭히 충분하다. 그런데 자신감이 부족하다. ‘연습장 메시’가 각 팀마다 하나씩은 있지 않나. 연습장에서만큼만 경기에서 보여주면 한국 축구 정말 대단할 거다.

지금은 그에 대한 답을 찾았나.

선수 탓만 하면 안 된다. 지도 방식과 지도자의 마인드를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P급 지도자 과정에서도 심리학 공부를 많이 한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니폼니시 감독님은 절대 선수들에게 질책 안한다. 지금의 인천 선수들은 학창시절엔 정상급이었지만 프로에선 아닌 선수들이 많아 더욱 그렇다. 사실 고민도 많았다. 처음 감독 대행 맡고나서 성적이 너무 안 좋으니 내게 “사람이 너무 유하고 카리스마가 없다”, “한국에선 저렇게 하면 안 돼” 이런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분들이 많았다. 휘어잡고 강하게 하라고. 갈등했다. ‘그냥 입에 거품 나게 훈련시킬까. 내 방식이 잘못됐나’ 싶었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 주관이 흐트러지고 지도 방식이 바뀌면 선수들은 더 갈팡질팡 할 거다. 성적이 조금 좋아졌다고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다. 선수들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도방식을 채택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그런 생각을 지켜 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사실 그런 점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현이와 남일이에게만 힘들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둘이서 내게 용기를 주더라. 잘 하고 있다고. 기현이는 유럽에서 존경받는 감독들도 모두 나처럼 한다며 용기 가지라고 얘기해줬다. 남일이는 히딩크 감독님 시절 예까지 들며 나를 보고 놀랐다고 하더라. ‘한국에도 이렇게 지도하려는 분이 있구나’라면서. 그래서 더 도와드리고 싶고 인천에서 성적도 잘 내고 싶다고 했다. 또 선수가 무엇을 원하고, 경기 앞두고 무엇을 훈련할지도 정확히 하시는 것 같다고 얘기해줬다. 두 사람 덕분에 큰 용기를 받았다.

사실 설기현과 김남일 모두 허정무 감독만 보고 인천에 왔던 선수들 아닌가. 그런데 허 감독이 떠나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도 됐었다.

그런 말이 많았다. 김봉길은 절대 설기현이랑 김남일 선발 라인업에서 못 빼고, 교체 못 시킬 거라고. 절대로 둘을 컨트롤 못하고 끌려 다닐 거라 했다. 그런데 요즘 좀 성적이 좋아지니까 어느덧 ‘선수들이 믿고 따르는 지도자’, ‘신뢰하는 지도자’라며 얘기해준다. 주변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나를 향한 야유나 질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선수들에게는 그런 말이 안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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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한 때 최고의 유망주 공격수

현역 시절 얘기를 좀 해보자. 사실 요즘 축구팬들은 잘 모르겠지만 김봉길이란 선수, 정말 대단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줄곧 공격수 랭킹 1위였고, 1990년 월드컵 앞두고 있던 연세대 시절엔 황선홍과 더불어 유이한 대학생 공격수로 대표팀에 선발됐었다. 저격수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프로에 와서는 기대만큼 활약하지 못했다. 그런 점들이 선수생활의 한으로 남지는 않았나?

내 입으로 말하긴 좀 쑥스럽지만 난 항상 1등이었다. 그런데 프로에 와서는 1등을 못했다. 당연히 번민이 많았다. 유공에 입단하고 처음 3년 동안은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팀을 잘못 골랐나? 감독님 스타일이 내게 안 맞나?’ 그런 핑계를 대며 정작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건 인정 못했다. 아니, 하기 싫었다. 생각이 부족하고 비겁했던 거지. 그러다 프로 4년차 때쯤, 결혼해서 가장이 되며 책임감이 생겼다. 그리고 친구나 주변에서 “예전에 김봉길이 고정운보다 잘 했는데…”라며 비교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 이를 악 물고 더 열심히 했다. 그래서 1995년에 다시 월드컵 대표가 됐다. 물론 그 때도 길게는 못했지만 6년 만에, 그것도 공격수가 다시 대표팀 선발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 때 선수로서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많이 성숙했다. 철이 들었 달까. 내가 정말 부족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인천에 그런 젊은 선수가 많다. 학창 시절 구자철, 이청용, 기성용, 김보경, 이승렬보다 훨씬 대단했던 선수들 말이다.

맞다. 그 선수들 전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봐왔다. 아마 걔네도 젊은 시절 나처럼 생각하고 있을거다. 그래서 일부로 내 경험 얘기도 해주고, 과거 내 활약 영상이나 신문 기사도 보여줬다. 깜짝 놀라더라. 김봉길이란 사람이 이렇게 대단한 선수였구나라고. 물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도 늘 최고였다. 하지만 프로에선 1등 못했다. 내가 자만하고 노력이 부족하단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은퇴할 때가 됐더라’란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효과는 있는 것 같았나?

내가 보기엔 아직 못 깨우친 것 같다. 철이 빨리 들어야 한다. 너무 늦게 들면 은퇴해야 한다. (웃음) 내겐 그 경험이 너무 소중했다. 덕분에 이후 전남으로 이적한 뒤엔 나름 제 2의 전성기를 보냈다. 많은 골을 넣으며 주장도 3년 하고 FA컵 우승까지 차지했다. 광양 구장에 관중도 늘 만원이었다. 재밌는 건 지도자로서는 스타트가 정반대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좋은 자양분이 된 것 같다. 지도자로서 너무 처음에 좋았다면 선수 때처럼 자만했을 거다.

김봉길, 소통하는 지도자

흥미로운 지적을 해보자. 감독 대행 된 뒤로 10경기를 못 이겼다. 그런데 인천 서포터스는 단 한 번도 네거티브 응원이나 비난을 공개적으로 보낸 적이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고백하건데, 감독 대행 되고나서 구단 홈페이지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2010년에도 5전 전패했던 감독대행을 왜 다시 세우냐”란 글이 있더라. 못 본 척했다. 구단 직원들한테도 난 홈페이지 안 본다고 거짓말했다.(웃음) 서포터스와 터놓고 얘기하고 싶었다. 한 번은 원정경기에서 패하자 서포터스가 선수들 인사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그 직후 서포터스 회장-부회장을 훈련장으로 초청해 식사를 했다. 그 자리를 통해 서로 원하는 점과 아쉬운 점을 솔직하게 털어놨는데, 공감 되는 부분이 있더라. 서포터스가 원하는 건 큰 게 아니다. 선수 얼굴 한 번 더 보게 해주고, 경기에서 승패와 관계없이 최선 다하는 모습 보여주는 게 전부다. 그래서 우리 선수들 요즘에 경기 전 몸 풀러 나갈 때 서포터스에게 먼저 인사하게 한다. 그리고 설령 지더라도 온 몸을 던져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그 대신 서포터스에겐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건강한 비판과 더불어 격려를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그랬더니 서포터스도 내게 절대적 지지를 약속했다. 서로에게 좋은 계기였다는 생각이다.

소통의 덕분일까. 요즘 K리그에선 성적이 부진한 팀 서포터스가 경기 후 구단 버스를 가로막고 항의하는 일이 잦은데, 오히려 인천은 첫 승한 날 서포터스가 버스를 막았다.

상주와의 홈경기에서 이기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서포터스가 버스를 막았다. “김봉길 보고 싶다”라면서. 감격했다. 나도 울고 서포터스도 울었다. 성적이 안 좋으면 욕을 해야 하는데 늘 내 이름 연호해주고 격려를 많이 해줬다. 참 감사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다. 인천 현재 리그 12위다. 현실 가능한 목표는 어디인가.

일단 최대한 빨리 강등권에서 벗어나야 한다. 확률 상 힘들겠지만, 궁극적으론 상위 스플릿(8강)에 들고 싶다. 상위에 가면 강등도 일찌감치 모면할 수 있고, 나머지 경기를 강팀들과 꾸준히 경기하면서 팀이 향상되고, 내년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많이 이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권투선수들도 일부러 훈련 때 복근에 공을 때리며 맷집을 키우지 않나. 우리 팀도 그동안 많이 지고 비기는 위기 속에 강해졌고, 결국 서울 같은 강팀을 이겼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위 스플릿에 가면 그런 점을 기대할 수 있다.

[피플+] 당신은 ‘축구감독 김봉길’을 아는가 원본보기 아이콘

김봉길, 반전 매력의 소유자

사적인 얘기를 좀 해보자. 평소 팝이나 락 음악을 즐겨듣는데다 유튜브 마니아라고 들었다. 겉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젊은 감각의 소유자라던데?

나를 어떻게 본건가(웃음). 내 유일한 취미가 음악이다. 선수시절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어디 나가서 취미를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다. 지금도 이글스, 마돈나, 퀸 같은 70~80년대 팝송을 많이 좋아한다. 쉬는 날엔 LP판 틀어주는 단골 맥주바에 자주 가서 음악을 듣는다. 또 라이브 공연을 좋아해서 유튜브에서 영상도 많이 찾아본다. 음악을 듣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아내나 아들은 운동하는 사람이 뭐 그렇게 음악 듣는 걸 좋아하냐며 신기해한다. 그래도 술 먹고 다니며 돌아다니는 거보단 나으니까 싫어하진 않는다. 근데 그거 어떻게 알았나?

또 하나 있다. 얼마 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신태용 성남 감독, 박경훈 제주 감독보다 훨씬 나은 패셔니스타”라고 사석에서 얘기했다고 들었다.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

아…. 내가 대학교 때 일본에서 ‘깃또’라는 백구두가 유행이었다. 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백구두 신는 사람 거의 없었다. 근데 난 신고 다녔다. 젊었을 땐 지금보다 인물도 훨씬 좋았고, 또 신촌이 유행의 거리 아니냐. 그래서 내 별명이 ‘신촌 백구두’였다. (웃음) 젊었을 때는 나이트클럽도 다녔는데, 워낙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초라하게 갈 수 없어서 좀 차려입고 다녔다. 어쨌든 지금은 튀고 싶은 생각 없다. 그때 그 발언은 그냥 나도 예전에는 알아주던 패셔니스타였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다. 사과한다. (웃음)

김봉길, 국가대표 감독을 꿈꾸는 지도자

긴 인터뷰여서 대답하는 사람도, 나중에 이걸 읽는 독자도 힘들겠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김봉길이란 지도자의 궁극적 목표는 어디인가.

일단 내가 지도하는 선수들에게 존경받는,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지금은 스페인 축구가 대세다. 짧고 세밀한 축구를 추구하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관중들이 보기에 즐겁고 멋있는 축구를 하고 싶다. 지금도 선수들이 자신 없이 롱볼을 차면 그건 조기축구도 하는 거라고, 진짜 축구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한 번 더 보고 줄 수 있고, 세밀하게 할 수 있는데 자신감 없어서 아무데나 차고, 돌파해야 하는데 돌파 못하는 그런 태도를 지적한다. 나아가 인천은 내가 태어나고 축구를 시작하고 자란 고향이다. 이곳에서 인정받아 감독이 됐는데, 이 팀을 다른 전통의 강팀들과 겨룰만한 팀으로 만들고 싶다. 나중엔 정말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도 되고 싶다. 또 내 축구인생에서 우승 못한 팀은 지도자-선수 통틀어 인천이 유일하다. 건방지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꼭 우승 한 번은 했다. 인천에서도 반드시 이룰 것이다.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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