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니 할 일 없고 잠도 안오는 밤, 어린 시절 보았던 것들을 가만히 마음으로 따라가본다. 젖은 손으로 씻은 물외를 건네주는, 누이나 어머니의 냄새 때문일까. 명태나 질동이(물동이)나 모밀국수, 남치마, 자개 무늬를 단 짚신같은 여성적 이미지에, 노루, 뫼추리, 노랑나비, 바구지꽃(박꽃)같은 동화적인 이미지가 곱게 섞인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의 끝에는, 어느 부엌 한켠에서 살짝 얼굴을 봤던 하얀 꽃같은 소녀의 이름, 천희가 미치도록 생각나는 것이다. 천희,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이쁘지도 않은 이름일 수도 있는데, 왜 이토록 마음을 뒤흔드는가. 백석이 저 수많은 추억물들로 예열을 시켜놨기에, 심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 이름이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각별함으로 남는 것일까.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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