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편지]3번국도변의 고요한 여행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지난주 못 심은 씨앗들을 뿌리기 위해 서둘렀다. 텃밭에 있는 새 아들놈은 얼굴을 살짝 비추더니 축구하러 간다고 마을로 내려갔다. "어제는 친구들과 약속이 깨져 축구를 못 했다"나 어쨌다나 투덜거리며 사라졌다. 하여간 축구에 미친 놈이다. 축구를 하고 돌아올 때 표정은 한결같다. 의기양양하면서 상기된 표정, 그건 놈이 지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표정이다. 아마도 축구가 행복한 모양이다. 곧 아내와 딸도 목욕탕에 간다고 나섰다.차를 타기 전, 딸도 일하는 내게 다가왔다.
"아빤 서울사람 같지 않다."
"헐 ! 아빠 서울 사람 아니다. 곤지암사람이지."
"아니 ! 서울로 직장 다니는 사람 ! 일하는 거 보면 어릴적 생각 나."
"......"
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빠하고 채소 심던 거 하고, 금강이랑 같이 흙 뿌리며 놀던 거하고...그런 거 다 생각 나."
"그럼. 아빠랑 씨앗이나 심고 놀자."
굳이 붙잡는데도 몇마디 던지고 엄마랑 딸도 사라졌다. 둘은 아들놈이 축구에 미친 것 만큼이나 목욕을 좋아한다. 하여간 딸이나 에미나...목욕하고 시장 가서 군것질하고, 물건 한두개 사거나 그냥 오거나...일요일 오후 나는 텃밭에 쪼그려 있고. 그저 그런 풍경속에 갇혀 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봄철 오후치고는 드문 경우다. 주변이 고요하다. 나는 불과 몇시간전 예정에 없던 여행을 하느라 파종 시간을 놓쳐 안달했다. 파종 시기가 늦으면 싹이 덜 난다. 지금은 처음 이곳으로 이주한 16년전보다는 일주일 정도 앞당겨 씨 뿌린다. 날씨가 예전보다 더워져서다. 바람이 없는 봄날 오후. 안달난 내게 고요가 말을 건다.
"네게 고요한 날이 얼마나 있었나 ?"
나는 답했다.
"세상살이에 찌들고, 떨치지 못하고, 욕망에 부글거리고, 때로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에 폭풍과 파도의 나날을 항해했다"고.
그래서 고요가 어색하다고.
여섯시간 전인 오전 7시. 나는 3번 국도 끝이자 시작점에 서 있었다. 아침 바람은 거셌고, 바다에 빠진 햇살들이 은빛으로 튀어올랐다. 남해군 초전마을. 한반도 모양의 시멘트 빗돌이 시점을 알려줬다. 조악스럽다. 곤지암으로 이주한 지 16년. 3번 국도는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도로다. 여행을 떠났다가도 혹은 나날이 출퇴근하면서도 나는 끝내 3번 국도로 돌아온다. 그 길은 출발점이며 귀환점이다. 어느 덧 인생이 3번 국도위에 있다. 3번국도는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가 ? 간절하게 가 보고 싶은 적이 많았다.
내 여자 동문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야영하면서 그 끝에 도달한 적이 있으며 지인 한 분은 친구와 손잡고 고향마을 상주까지 3번 국도를 따라 귀거래사를 한 적이 있다. 길을 인생에 비유할 때 그 시작점에 섰다거나 끝난 지점에 이른다는 다소 무거운 주제다.
3번 국도는 초전마을에서 시작돼 함경북도 초산군으로 이어진다. 장장 1199km. 그야말로 3천리길이다. 3번국도는 그렇게 한반도의 중앙을 종단한다. 다시 블라디보스톡과 연결되고, 북방로를 횡단해 몇개의 국경을 넘어 유럽끝 마드리드에 이른다. 나는 어느 시작점에 도달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물론 간 적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담거나 또 가보기를 바랬던 길은 없다.
초전마을. 입속으로 마을 이름을 되뇌이다가 어떤 구호 하나가 떠올랐다.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다. 어릴적 담벼락이나 입간판에 많이 붙어 있던 말. '초전 박살'. 설겅거리는 낱말들이 입속을 맴돌았다. '멸공 방첩'만큼이나 흔했었다.
'전쟁과 관련은 없겠지 ? 이처럼 평화로운 풍경을 가진 마을이...' 마을 유래를 담은 빗돌이라도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없다. 나는 왜 3번국도, 땅끝에 와서 전쟁을 떠올렸을까 ? 상상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순신장군도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천포 해협 안에서 싸우거나 초전마을 뒷편의 만(灣)으로 유인해 싸울 수는 있을 것이다. 만에서도 싸움은 유리한 형세이기는 어렵다. 양쪽 곶에서부터 봉쇄할 경우 포위, 고립된다. 그러니 마을 유래는 싸움과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저 어릴 적 데쟈뷰인 셈이다.
나는 3번국도 시점에서 되도록 많은 감상을 갖기 위해 안온한 바다와 꺽이고 접힌 리아스식 해변, 바다에 와서 더 나아가기를 멈춘 산맥, 꽃잎을 떨구고 있는 동백과 벚꽃, 유채꽃 등 여러 풍경으로 머리속에 담으려 애썼다. 언제 다시 오기를 기약할 수 없으니.
살면서 제일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과거로 돌아가보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무수히 되돌아가보고 또 돌아가본다. 16년전 잣나무골로 이주하던 날까지도 가보고, 그 너머 갯벌에서 고기를 잡던 어린 날에도 가 본다. 그러나 어떤 시간들은 완벽히 지워버려 단연코 그 시절에 대한 얘기조차 해본 적 없는 날도 있다.
이른 봄에 씨를 뿌리는 시간, 어느 길에서 출발하게 되는 시간, 인생에서 설계를 하거나 꿈을 갖는 시간들이 한꺼번에 겹친다.ㅠ ㅠ. 고요함마저 어색하지 않은 여행이 다시 시작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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