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잣나무골편지]닭들은 축구를 무서워한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지난 새벽 놈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치킨 한마리를 혼자 다 해치웠다. 놈에게서 치킨 없이 축구를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안거리에는 두개의 치킨집이 있다. 잣나무골에서 안거리까지는 2km. 그들이 경쟁하기전까지는 한밤중에 치킨을 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녔다. 영심이네 치킨집 옆에 새로 하나 더 생기면서 치킨은 밤 열시에도 배달된다.하여간 놈은 잠들기전에 치킨을 주문해놓은 모양이다.


전날 나는 이른 시간에 잠을 청했다. 9시가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잠들기 전 놈은 새벽에 진행되는 바르샤-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경기를 함께 보자고 보챘다. 나와 놈은 축구를 보는 동안 하나다. 새벽 경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놈은 오랫동안 호날두의 팬이다. 나는 메시의 팬이다. 열 아홉살 경기를 처음 나설 때부터 나는 그의 축구를 좋아했다. 예전 같으면 우리는 서로 다른 팀을 응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놈도 바르샤의 팬이다. 놈과 나는 맨유-바르샤의 대결을 학수고대했다.

그래서 순순히 동의했다. 그건 놈이 치킨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뜻한다. 모르긴 해도 내가 잠들고 나서 아내를 무척 졸랐을 거다.
"아빠랑 새벽에 축구보기로 했단 말이야. 치킨 시켜줘. 치킨 없이 축구 라는 건 양파 없이 자장면 먹으라는거야. 그럴 수 있어 ?"
안 봐도 환하다. 치킨이 도착하면 놈은 방에 숨겨둔다. 누나가 몇조각만 달라고 졸라도 꿈쩍 안한다.


"축구할 때 아빠하고 먹을거야. 그러니까 아빠한테 물어봐."
약은 놈. 아빠를 팔아서 치킨을 확보하는 수작이란...경기가 전반을 마치기도 전에 치킨 한마리를 혼자서 다 해치운다. 아빠와 먹겠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다. 내 침대 모서리에서 치킨에 빠진 것인지 축구에 빠진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TV는 내방에 있다. 그래서 놈은 늘 침대 모서리 앞에서 축구를 본다. 아주 소리없이 닭을 뜯으면서도 눈길은 TV를 떠나지 않는다. 침대에서 놈을 바라보면 축구에 넋나간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나도 잠결에 일어나 차가운 치킨 다리 하나를 집어든 적이 있다. 푸석하다. 한 입 베어물고는 다시 내려놨다. 새벽에 식어버린 치킨을 먹을 수 있는 놈의 식욕이 부러울 지경이다. 오늘 새벽에도 놈은 여지없이 혼자서 축구를 보며 치킨 한마리를 먹었다. 맨유-바르샤의 경기가 열리는 날은 두마리를 시켜놓자고 할 것이 분명하다.  
축구가 번성할수록 닭들에게 불리해진다. 혹은 닭들의 수난은 더욱 광폭해진다. 축구가 닭의 천적이다.


이틀전이다. 점심밥을 먹는 동안 아들놈이 내내 투덜거렸다.
"도무지 밥을 먹으라는거야.쓴 나물을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밥을 비비려면 두개로 나눠서 하든지..."
투덜거리던 놈은 라면을 끓여먹겠다고 부엌으로 가고 나서는 혼자서 커다란 양푼을 끼고 밥과 씨름을 벌였다.
애시당초 밥 한그릇만 비빌 노릇였다.
이른 아침부터 잣나무골은 황사에 갇혔다. 나는 방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새 아내와 딸은 곤지암도서관엘 갔다. 다음주가 딸 중간고사기간이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나는 상추 비빔밥이 간절해졌다.


"아빠 상추비빔밥 해먹을거다.너도 먹을래 ?"
"좋아.많이 비벼줘"
놈도 선뜻 응답했다.
나는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 가득 상추를 따고 나선 부추, 당귀, 오가피, 고들빼기, 민들레를 약간 더 땄다. 당귀는 재작년 여덟 포기를 심었다. 다년생이라서 한번 심어놓으면 여러 해를 따먹을 수 있다. 처음 이사 와서 얼마 후 오가피는 뒷산에서 깨다 심은 것이다. 둘은 향이 강하고 맛이 오묘하다. 쓴 맛이 나는 민들레와 고들빼기는 집 주변에 널려 있다.
상추를 먹을 때 함께 얹는 야생초들이다.


커다란 양푼에 밥과 상추, 나물, 고추장을 넣고 멸치볶음을 섞었다. 계란 프라이 두개를 얹고 나자 군침이 돈다. 나와 놈은 내방으로 들어와 소반을 펼치고 앉았다. 놈은 첫술을 뜨고는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도저히 못 먹겠다. 너무 써 .멸치도 딱딱하고...아빠나 먹어라."
놈이 배신 때렸다. 그러던 놈은 마침내 라면을 끓여다 옆에서 먹는다. 비빔밥을 반쯤 먹었을 땐 배가 부르고 남은 밥이 슬슬 걱정됐다. 라면 냄새가 구수했다. 입맛이 나랑 다른 놈은 아직 상추 맛 외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놈은 밀가루 음식을 특히 좋아한다. 국수, 우동, 햄버거, 빵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런 놈에게 쓴 맛나는 나물이 달가울 리 없다.

AD

"이놈아. 네가 아직 배가 불러서 맛을 모르지. 배고파봐라. 이것도 없어서 못 먹는다. 지금 아프리카에 굶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그냥 치킨이라고 생각하고 먹어라."
어림 없다. 놈도 지지 않는다.
"내가 아프리카에 살어 ? 아빠가 그거 먹는다고 아프리카 애들이 밥을 먹게 되는거야 ?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맞는 말이기는 하다. 이런 얘기는 나도 아버지한테 밥투정할 때 비슷하게 들어본 적 있다.
밥 먹는게 힘겨워졌다.
"라면 먹고 싶어 ? 아빤 몇살 때 라면 처음 먹어봤어 ?"
"초등학교 3학년 때."
"헉 ! 그럼 40년 정도나 라면을 먹은거야. 그럼 라면 엄청 먹고 싶겠다."
놈이 계속해서 놀려댄다. 생각 같아선 덥썩 놈의 냄비에 젓가락을 넣고 싶다. 참는다.


"앞으로 네놈의 먹거리는 거대한 치킨회사와 라면회사에 달려 있다. 순순히 자기 운명을 내던지다니. 한번 당해봐라 ㅋㅋㅋㅋ"


이규성 기자 peac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