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잣나무골편지]상추 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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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황사가 가득했다. 바람은 숲으로 쉬러 가고, 새들은 숲을 나왔다. 뱁새, 참새 등 토종새들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난주 삽질해놓은 텃밭에 비닐을 깔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다. 혹시 방사능비라도 내릴지 모른다.일단 텃밭의 1/3 가량 고구마와 옥수수, 콩 심을 자리는 다음 주말로 미뤄두기로 했다. 오늘 일기를 감안한 계획이다.


막 일을 시작하려니 비가 몇방울 떨어진다. 그대로 일손을 팽개치고 집안으로 피신한다. 잠시 후 비가 멎었다. 또 나와서 일을 시작한다. 다시 몇방울 떨어진다. 큰 비도 아니고 빚줄기가 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몇방울이다. 또 도망친다. 비 오면 피하고, 멎으면 다시 나가 비닐을 깔고. 그렇게 세차례를 하고서야 스무고랑 비닐을 덮었다. 그런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약도 오른다. 한여름 장마에 온몸을 적시며 삽질하는 적이 있다. 가끔은 비를 맞고 싶어 일부러 농기구를 들고 텃밭과 마당을 오간다. 일하고 나서 처마 낙수에 샤워하는 기분이란 여간 아니다.  

예전 같으면 몇방울 떨어지는 비를 그냥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미량의 방사능은 내게 큰 해를 주지도 못할 것이다.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다. 'ㅋㅋㅋ ! 잣나무골이라는 작은 숲도 일본 원전 폭발이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니...재앙도 갈수록 세계화ㆍ글로벌화되는게 여실하다.' 바람 멎고, 비 뿌리는 날의 진풍경이랄까.


텃밭에 비닐 덮는데는 두사람이 있어야한다. 맞는 편에서 비닐 한끝을 잡아주고, 마주 오며 흙 덮는 식이다. 바람에 비닐이 날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바람 한점없어 혼자 작업을 시작했다. 아내도 별로 텃밭에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나도 일부러 불러내 함께 비에 쫓겨다니고 싶지 않았다. 몇방울 비에 부부가 쫓겨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참 가관일거다.

그렇게 오전이 지났다. 비도 멎었다. 대신 바람이 불었다.


오후 들어 곤지암에 나가 모종으로 상추 100포기, 봄배추 100포기, 금장대파 200포기, 양파 50포기, 근대, 아욱, 상추 씨앗 등을 샀다. 지난해보다 30% 가량 가격이 올랐다. 상추 모종은 잎상추, 꽃상추, 로만 상추, 토종 상추 등 네종류를 샀다. 모두 가격은 5만원.


상추는 병충해에 강해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할 수 있다. 심어만 놓으면 어디서든 잘 자란다. 수확량도 많다. 상추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우선 고기나 생선구이를 싸서 먹을 수 있고, 겉절이나 샐러드로 먹을 수 있다. 심는 방법도 간단하다. 각 포기마다 15cm 간격으로 심는다. 잎을 작게 기르고 싶다면 조밀하게 심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요즘은 변종도 많고, 쌈용이나 샐러드용 등 종류도 다양하다. 외국산과 교배된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 상추가 언제 전래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고려시대 '향약구급방'에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신라 말기부터 재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500여년 이집트에서 재배된 것으로 나타난다.


상추는 불면증 해소와 정력 증강에 효과가 뛰어나다. 철분이 많아 혈액을 증진시키고 피를 맑게 한다. 상추는 찬 음식이라서 화병을 풀어주고 머리를 총명하게 해주는 효능도 있다. 특히 '락투카리움'이라는 성분이 있어 신경 안정, 진통, 최면에도 효험이 있다. 락투카리움은 상추잎에서 나오는 하얀 진액이다. 바로 쓴맛을 내는 성분이다.


그래서 상추는 쌉쌀하면서도 아삭아삭해 봄기운을 느끼는데 제격이다. 된장하고도 어울린다.


누구나 상추를 먹던 추억이 있을거다. 내게도 그렇다.
여름철 모깃불을 피워놓은 마당에 온 가족이 멍석 깔고 둘러 앉는다. 상 한가운데엔 커다란 상추 바구니가 놓여 있다. 그 옆에 풋고추를 썰어놓고 끓인 강된장,구수한 냄새가 번진다. 할머니는 넓직한 상추잎 하나를 집어 멍석 밖으로 물기를 탁탁 턴다. 그런 다음 잎의 앞뒷면을 잘 살펴보고는 뒷면에 밥과 된장을 얹어 싸먹는다. 물론 무슨 법칙이 있거나 맛을 살리기 위한 격식은 아니다. 혹시 뒷면에 벌레라도 있는지 살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별스럽지는 않더라도 할머니의 상추먹는 모습은 내게 아직도 선연한 추억이다.


봄 행락철이 되면 잣나무골을 찾는 방문객도 많아진다. 대체로 잣나무골을 찾는 친구들은 곤지암쯤에서 전화를 한다.
"뭐 사갈까 ?"
"고등어나 꽁치 몇마리 사와."
"삼겹살은 ?"
"굳이 먹고 싶으면 사오든지..."
방문객들은 그렇게 일러도 한사코 삼겹살을 사온다. 그저 마트에서 꽁치나 고등어 사오면 좋으련만. 허구헌날 삼겹살을 먹어야하는 난 곤혹스럽기만하다. 사실 잣나무골로 이주하기 전에는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곳에 이주하고 나서 흔히 먹는 음식이 됐지만 말이다. 상추잎에는 삼겹살보다 생선구이를 얹어먹는 것이 더 맛있는 것 같다. 참나무숯에 구운 꽁치나 고등어를 떼어내 저민 마늘 한점 넣고, 고추장을 발라 상추에 싸먹는 맛은 일품이다. 간혹 오가피나 당귀잎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상추씨는 4월초순에서 5월초순까지 파종한다. 상추잎을 일찍 맛보려면 지금쯤 파종에 앞서 모종을 내면 된다. 오후 들어 모종 심기를 서둘렀다. 일을 좀 도와달라는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녀석은 세시경쯤 축구한다고 마을로 내려갔다. 괘씸한 놈 !


상추 1.5고랑, 배추 1.5고랑, 파와 양파 한고랑. 모종심기를 마치고 나설 때쯤 바람이 거세졌다. 잣나무들도 일렁이고, 앞집 변호사네 풍경소리도 거칠어졌다. 웅덩이에서 물을 퍼다 나눠주고 나니 서녘에 해가 걸렸다. 그새 황사는 더욱 거칠어졌고, 해는 붉었다.


다음주에는 나머지 밭에 비닐을 덮고, 말경에는 토마토, 고추 등 다른 채소들 모종도 내야된다. 이제 바쁜 시간이 됐다.  


<4월 첫주>


밭에 퇴비를 뿌리는 것으로 올해 첫 농사를 시작했다. 요즘 들어 인플레이션이 오고, 식품 가격이 갈수록 오르고 있다. 곧 식품 전쟁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먹거리가 부족할 때 혁명의 도화선이 당겨졌다. 전쟁, 기근, 역병 등 재앙이 넘치고, 먹거리가 부족하다면 이것은 파국의 징후일 수 있다. 이런 세상의 한편에서 내 농사가 무슨 의미일런지..


우선 다섯평마다 한포씩 발효퇴비를 뿌렸다.척박한 땅이라면 세평 정도에 한포가 적당할 것이다. 닭똥이나 쇠똥 발효분은 모종 내기 보름전에 흙과 뒤섞어둔다.그래야 어느 정도 독성이 빠지고 적당히 썩어 식물들이 영양을 섭취하기에 알맞다. 농사가 단순한 것 같아도 막상 해보면 복잡하다.


우선 퇴비를 뿌리고, 삽질(경운기 로터리)한 다음 고랑(두둑)을 만들었다. 고랑을 만드는 이유는 배수 때문이다. 거의 모든 작물들이 배수가 잘 되는 땅을 선호한다. 고랑을 만들고 두둑 위의 흙을 쇠스랑으로 고른다. 흙덩어리를 으깨고 최대한 부드러운 상태를 만든다.


삽질은 반복적이어서 금새 지쳤다. 오랫동안 녹슨 몸에서 여기저기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삽질 서너번 하고도 이내 허리가 뻐근하다. 총 스무고랑. 맨 처음 위에서부터 착실히 삽질하다 세고랑쯤에서 인내가 바닥난다. '나머지 열일곱고랑. 언제 일구나 ?...' 이런 생각을 들고 나서는 나머지 일들이 걱정이다.


그래서 터득한 방법이 있기는 하다.


중간 고랑을 먼저 판다. 나머지 일곱고랑씩 두 덩어리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양편을 왔다갔다하면서 삽질한다. 아주 알퍅한 전략이지만 실제 해보면 덜 지친다. 일종의 착시효과다. 일하고, 지치고, 어느 한편 몸이 혹사되는 즐거움에 빠질 때쯤 어떤 성취감이 있다. '노동이 신성한거니 어쩌구..' 말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있기는 분명히 있다. 물론 그것들은 다 관념에 불과하기는 하다. 큰 수확을 낼 것도 아니고, 자투리시간을 이용한 노동이 대단할 일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삽질을 계속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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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아버지들은 평생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어떻게 견뎠을까 ? 그이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길래 ? 내 아버지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듯 하다. 허면 내가 삽질한다고 어떤 희망이 있나 ? 나도 내가 속한 계급이 곧 아들의 계급이란 정도는 이미 알아챘다. 골품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마당에 평민출신인 우리에게서 아들에게로 가난을 세습하기가 더 십상이란걸...


그래도 다시 삽질은 계속되리라.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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