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편지]좋은 세상과 불편한 세상 사이에 황사 덮히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황사 옅게 덮힌 잣나무골은 적막했다. 나는 오전 내내 텃밭에 나가 고춧대 뽑고 배수로와 옹달샘을 청소했다.지난 가을에 했어야할 일이다. 마당에 흩어진 낙엽도 끌어다 불을 질렀다. 아들녀석이 잠시 불을 지키다 집안으로 들어가고,매케한 연기가 잣나무골에 가득 차오르는 동안 봄맞이를 계속했다.


 봄이 저만치 옵니다그려.
 술 취한 듯, 실성한 듯 비틀대며 옵니다그려.
 낄낄거리며 목발 짚고
 휘청대는 꼴이 우습습니다그려.
  
 들판, 산길 어디에도
 저는 굽이쳐 온다지만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 이랑에서
 끝내 고꾸라지고 맙니다그려. 
  
며칠새 잔설도 사라졌다. 텃밭자리엔 냉이가 한참 자랐다. 소나무 밑의 맥문동이 푸르게 번졌다. 돌나물,소루쟁이도 막 얼굴을 내밀었다. 곧 돌나물 김치나 된장국을 끓여 먹을 수 있겠다.

'지난 겨울 제대로 추웠는데...언제 사라진거지 ?'


이 봄도 지난 겨울처럼 곧 지나가리라. 내가 텃밭에서 일하는 시간은 일년에 삼십여일이 조금 넘는다. 지금 삼십여일 중 그 하루를 보내고 있다. 4월 중순경에 파종하고, 5월초순에 모종을 하려면 3월에 밑거름해야한다. 채소마다 파종할 것과 모종할 것이 다르다. 상추, 쑥갓, 아욱, 근대, 청경채 등 잎을 먹는 채소들은 파종하고, 토마토, 고추, 호박, 오이, 수박, 참외 등 열매를 먹는 채소는 모종한다.

해마다 한달이란 시간은 작은 텃밭에서 농사 짓고, 마당의 잡초 제거하고, 그런대로 주변을 가꾸고 살려위해선 당연히 지불해야한다. 도시의 아파트에 산다면 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루 일당 10만원짜리 노동을 한다치면 300만원을 벌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한달은 전혀 돈이 안 벌린다. 비록채소를 자급자족하기는 하지만 가계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매년 씨앗과 모종, 퇴비, 농기구 등의 비용으로 대략 10여만원을 쓴다. 내가 생산하는 채소는 전혀 환금이 안 되니 값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가족이 일년동안 먹을 채소를 생산하는데는 20여평 정도면 충분하다. 내가 농사짓는 텃밭은 150여평,130여평분은 과잉생산이다. 채소의 경우 먹고 남아 대부분 버려진다. 그나마 방문자가 있어야 조금 나눌 수 있다. 생산량을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지만 대략 값어치로 150여만원 정도 되는 것 같다.


콩 0 되, 고구마 00 박스, 고추 00 근, 수박 0통, 참외 00개, 토마토 00 바가지...이런 식의 자잘한 생산물을 얻는게 전부다.  


노동력에 비하면 엄청난 손실인 셈이다. 나는 경제신문기자다. 그런 편에서 전혀 경제신문기자답지 못 하다. 저급한 생산성, 불필요한 노동력 투입, 과잉 생산, 낭비, 근본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 생산물 등등...그러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게 웃길 지경이다.


내 농사법과 경제학이 엉망이다. 이미 농사가 댓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값을 따지고 어쩌고...내가 경제신문기자답지 못할 정도로 정체가 모호한 것처럼 농사를 짓는 내 정체도 모호하다. 정확히는 아주 불편하다. 이같이 불편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게 제대로인지 여전히 황사속에 갇혀 있는 듯 하다.


오후 들어 바람이 거세졌다. 대개 봄철엔 오후에 바람이 세진다. 모닥불을 더 철저히 지켜야한다. 숲으로 옮겨붙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모닥불가에서 잠시 늙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젊어서 염부(鹽夫)였던 그이는 육남매 독립을 시키고도 우리 동네에서 농협 빚이 없는 유일한 농부였다.그이는 어린 아들에게 늘 강조하던 것이 있었다.


"절대로 빚지지 말아라. 누구에게 신세질 생각도 말아라. 그렇게만 하면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 수 있다."


그이는 밥그릇에 밥알 하나라도 붙어 있을라치면 엄한 꾸중이 내렸다.연필 한자루, 공책 하나도 첫장부터 살펴본 후에야 돈을 줬다. '빚'을 지지 않는 것은 그이의 유일한 경제학이었다. 그래서 결코 빚을 지지 않았고, 나중엔 아들이 행여 빚을 질까 두려워했다.


언젠가 그이와 선산엘 가기 위해 서해대교를 건넌 적이 있다.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이 바다를 가로질러 다리가 놓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바다를 차 타고 건너는 세상이 올 줄이야…."그이가 말했다.그이가 다리 하나를 보고 '좋은 세상'이라고 일갈한 것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내게는 그저 큰 다리에 지나지 않으며 이미 경험한 것들이다. 그이에게 다리를 넘어서 바다를 건너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면 나의 '좋은 세상'은 아직 온 것같지 않다.


아산만은 그이가 가난과 싸우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내게도 바다에 나가 어린 날을 보낸 추억 정도는 있다.그렇다쳐도 다리 하나로 '좋은 세상'에 대한 구분은 되지 않는다. 그이에게 있어 좋은 세상은 빚이 없고 무난히 아이들을 독립시킬 수 있는 정도였을거다. 부자는 아니어도 염부에서 자영농으로 상승한 것 또한 좋은 세상의 척도였을 수도 있다. 하여간 그이는 노년을 좋은 세상에서 보낸다.


"재테크하려 하지 말자. 그 대신 절대 빚 없이 살자."
나도 지금껏 그렇게 살림을 꾸려오고는 있다. 아내도 그 흔한 펀드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이와 닳은 경제학을 구사하기는 하나 작은 텃밭과 그에 바치는 노동, 생산물, 댓가 등으로는 결코 좋은 세상일 수 없다. 내가 그이의 좋은 세상을 엿보았던 것 ! 그 반대편에 서서 불편한 세상에 대해 여전히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AD

그이보다 넓은 집, 좋은 차, 깨끗한 옷, 사치한 음식은 물론이려니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소유하고 있는 나의 경제학은 늘 불만이다.어두운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헤어나질 못 한다. 소비가 결코 줄지 않고, 오히려 확장돼 가고 있다.간혹 이웃들이 중형차라도 사면 나도 갖지 못해 안달이다. 허세로 가지고 있는 물건도 많다. 겨우 나와 가족의 안위에만 급급한 정도로 살면서 보잘 것 없는 노동에도 값을 따지려치니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봄은 또 오고, 언제 어느 모습으로 내게 좋은 세상이 다가올런지 ?...황사가 그치면 꽃이 피리라.


이규성 기자 peac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