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골편지]딸이 화났다.아내도 화났다
<하나> 평강이가 화났다.
"도대체 아빠는 왜 그러는거야 ? 친구앞에서 나 망신주기로 작정한거야 ?"
"아니 왜 ? 난데없이 망신 주다니 ? 우리 딸 오늘 떡볶이가 맛 없었니 ?"
밤 열시경 퇴근길. 야간자습을 마친 평강이를 데리러 학교로 갔다. 친구와 함께 뒷자리에 오른 평강이는 재잘거리느라 아빠를 돌아볼 새도 없다.연곡리 사는 친구 재윤이는 평강이와 초등학교, 중학교을 거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니는 친구다. 평강이와 재윤이가 단짝이 된 이유는 둘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덕분이다.
평강이와 재윤이는 올해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한다. 한때 평강이에겐 친구가 없었다. 학원에 다녀야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다. 방과 후 모두들 학원에 가니 별 수 없다. 지난해부터 평강이 곁에는 재윤이가 꼭 붙어 있다.
둘은 무슨 할말이 많은지 연신 시끄럽다. 그러던 것이 눈치고개를 넘을 때쯤 평강이 말소리가 잦아들고, 곧 조용해졌다. 그러려니 했다. 연곡리에서 재윤이를 내려줄 때까지 아무런 낌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곧 친구가 내렸다. 그러자마자 평강이가 노발대발한다.
"친구한테 아빠 지저분한 거 보여주면 좋아 ? 왜 운전하면서 꼬딱지 파는거야 ? 말해봐 ! 나 망신주려고 그런거지 !..."
"그려 ? 그랬나 ? 미안. 다음부터 안 그럴게. 화 풀어라...응 ? 말을 하지 그랬어.ㅋㅋㅋ "
"말 하라고 ? 어떻게 ? 도무지 아빠는 생각이 있는거야 ?"
딸들이 화내면 무섭다. 대개 아빠들이 그럴거다. 아내보다 무섭다. 특히 고2쯤 되는 딸은 여간 힘들지 않다. 그것도 단짝친구인 재윤이 보는 앞에서 그랬으니 화낼만도 할 것 같다.재윤이 아버지는 그애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 이곳으로 이사와 한우고기 식당을 한다. 형제가 여섯인 재윤이는 막내다. 어릴적부터 함께 지내온 아이들이지만 제딴에는 다 큰 숙녀들이다. 분명 아빠라도 거스를만하다.
"제발 매너 좀 지켜줘...내가 딸이라고 아무렇게나 하지 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야단 칠 수도 없다. 큰 죄진 것처럼.
"ㅋㅋㅋ ! 근디 내가 아주 좋은 방법 하나 가르쳐줄게. 화 풀어라. 네가 싫어하는데도 무작정 쫓아다니는 남자애가 있으면 꼭 이 방법을 써봐. 일단 눈을 게슴츠레 뜨고 멍하게 쳐다보면서 코딱지를 파는거야. 남자애가 말을 할 때는 딴데를 쳐다보고... 그러면 얘가 좀 멍청한가보다 하고 다시는 안 쫓아다닌다.ㅋㅋㅋ"
아이가 더 화 났다. 농담이 기름을 부은 꼴이다. 아주 길길이 날뛴다.
'애도 참 !! 사람 엄청 무안하게 만드네..ㅋ'
<둘> 아내가 화났다. 퇴고할 기사 데스킹에 한참 바쁜 오전 시간 전화선 저쪽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당신 왜 똥을 안 치우고 가니 ? 나를 똥이나 치우는 사람으로 아니 ?"
새벽녁 출근 직전 마당가에서 큰 일을 보고 그냥 출근해버린 것이다.집에서 출발하는 시간은 4시40분 전후. 꼭 이때 일을 본다. 다른 시간대로 조절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소용이 없다. 사방이 막힌 욕실에서 해결하기도 싫다. 똥을 싸면 정화조에서 걸러지기는 하지만 결국 개울로 흘러가게 된다. 환경오염이 될거라는 부분도 욕실을 거부하게 한 이유다. 대체로 마당에 나와 일을 보는데 좀 늦거나 귀찮으면 그냥 출근하고 만다.
한낮에 아내가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똥무더기를 본 것이다.
"언제까지 그럴래 ?.잘 치우고나 가라 좀..."
아내의 푸념에 "알았다. 다음부터 잘 치울게..." 어쩌구 옹알이하듯 대충 대답하고 얼버무린다.
몇년전 가을 아내는 추석을 앞두고 우리 집 뒷편 무덤에 벌초하러 왔던 이웃이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똥을 밟는 광경을 목격한 적 있다. 그때까지는 마당에 똥 싸놓고 그냥 출근해버리는 나를 어느 정도 귀엽게 봐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아내는 이웃들에게 망신을 당했다고 핀잔이 여간 아니었다.
마당 혹은 텃밭가에서 새벽에 똥을 누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좀 지저분한 얘기지만 싸늘한 바람결에 일렁이는 별밭을 보며 일 보는 재미는 유별나다.가끔은 고양이가 물끄러미 지켜보며 지나가기도 한다.
여름 날엔 앉아서 일보는 자리에 뱀이 있나 잘 살펴봐야한다. 그래서 항상 어둠속 마당가에 나갈 때는 낡은 골프채를 들고 간다. 땅바닥을 휘저어보고 자리를 잡는다. 밖에서 일 보고 호박 구덩이에 묻어주면 거름도 되고, 환경 오염도 막아주니 일석이조다.
전원에서의 생활은 도시와 다른 부분이 많다. 쓰레기를 처리한다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약간의 채소를 키우니 마당에서 일 보고 호박구덩이에 묻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삶의 방편이 도시 의존적이기는 하나 어느 정도 주변 환경과 동화되거나 동화하려는 노력이 불가피하다.
"환경을 생각해서 밖에다 누는거 좋잖여...채소도 기를 수 있고.ㅋㅋㅋ"
오늘 또 아내가 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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