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사이언스 포럼]기능에 디자인을 입혀라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구소련이 붕괴한 직후 산업시찰과 협력 사업을 목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한 서방 진영의 경제 주체들은 두 번이나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장막에 가려져 있던 러시아의 기초과학 기술력의 우수성에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둘째는 우수한 기초과학 기술력으로 탄생한 제품들을 포장하고 홍보하는 디자인의 열악함 때문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실용과학과 공산경제체제가 만들어 놓은 불균형이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최첨단 과학기술로 제조한 약품들을 기본 단위 포장이 아닌 일반 상품 포장의 경우처럼 100개 단위로 하나의 봉투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에 적정량에 맞춰 유통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 포장 단위는 말할 것도 없고, 포장과 디자인의 개념이 극히 정보 전달에 국한돼 있었던 것이다. 자유경쟁 경제체제가 발달되지 않았던 구소련의 제품들이 지닌 기능과 디자인 사이의 현격한 격차는 이제 과거의 에피소드처럼 회자되곤 한다. 하지만 기능과 디자인을 보는 시각에는 여전히 일정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둘은 경쟁적 대결 구도를 이루고 있는가.
기능과 디자인은 상호보완적이며,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소쉬르가 말했던 기표와 기의로 사물의 존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논의는 다분히 이론적이고 분석적이지만 실체를 실증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제한적이다. '사과' 혹은 'Apple'이라는 단어는 소릿값으로서 [사과]와 [æpl]이라는 상이한 기표를 지닌다. 하지만 둘은 실체로서 <사과>라는 사물의 기의를 반영한다. 물론 기의에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덧붙여져야 하며, 기표 또한 문화코드의 종속 변이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모르는 한국인에게 [æpl]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æpl]이라는 기표가 대표하는 기의로서 <사과>라는 실체의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얼핏 기의로서 사과라는 실체가 지닌 내용과 기능이 전달력이나 표현 혹은 디자인에 앞서는 것처럼 보인다.

내용과 형식으로 얘기를 풀어보자.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대한 접근은 내용과 형식의 구분에 대한 접근 방식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논리이다. 언어적 표현이 지닌 어휘와 표현의 중요성이 강조돼 인식되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비어휘적 언어표현이 실질적 소통에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얼굴의 표정과 손짓, 어깨의 움직임, 느낌과 이미지 등이 빚어내는 소통의 효과는 어휘와 표현이 직접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내용 그 이상이라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기능과 디자인의 중요한 가치에 대한 논의가 자칫 상대적 우수성과 필요성에 의한 논의로 과장되는 측면이 드러난다. 기능의 개선과 발전이라는 목표와 디자인의 개발과 향상은 모두 중요하다. 디자인은 기능을 포장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반영하고 보완하며 협력하는 개념으로 발전돼야 한다. 기능에 대한 접근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의 용도와 활용가치, 그리고 기호와 이미지에 관련된 디자인을 염두에 둔 기능의 발전이 없었다면 소형 컴퓨터의 개발과 같은 기능에 대한 전환적 사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능과 디자인은 사물의 기표와 기의처럼 혹은 내용과 형식처럼 이분법적 분리에 의한 요소가 돼서는 곤란하다. 일본이 개국 이래 줄곧 기초과학기술에 매진했던 것만큼 디자인에 대한 연구에 집중해 왔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실체적 사실이다. 21세기 기능과 디자인은 상호보완적 측면을 넘어 융합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성주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오동운 후보 인사청문회... 수사·증여 논란 등 쟁점 오늘 오동운 공수처장 후보 인사청문회…'아빠·남편 찬스' '변호전력' 공격받을 듯 우원식,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 당선…추미애 탈락 이변

    #국내이슈

  • 골반 붙은 채 태어난 샴쌍둥이…"3년 만에 앉고 조금씩 설 수도" "학대와 성희롱 있었다"…왕관반납 미인대회 우승자 어머니 폭로 "1000엔 짜리 라멘 누가 먹겠냐"…'사중고' 버티는 일본 라멘집

    #해외이슈

  • '시스루 옷 입고 공식석상' 김주애 패션…"北여성들 충격받을 것" 이창수 신임 서울중앙지검장, 김 여사 수사 "법과 원칙 따라 제대로 진행" 햄버거에 비닐장갑…프랜차이즈 업체, 증거 회수한 뒤 ‘모르쇠’

    #포토PICK

  • 車수출, 절반이 미국행인데…韓 적자탈출 타깃될까 [르포]AWS 손잡은 현대차, 자율주행 시뮬레이션도 클라우드로 "역대 가장 강한 S클래스"…AMG S63E 퍼포먼스 국내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한-캄보디아 정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수립 세계랭킹 2위 매킬로이 "결혼 생활 파탄이 났다" [뉴스속 용어]머스크, 엑스 검열에 대해 '체리 피킹'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