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출근하려고 마당에 나선다.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휘파람새 소리가 유난하고 별들은 총명하다. 그 시간 북두칠성은 서북편 무갑산자락에 걸려 있다. 나는 얼른 북극성의 자리를 가늠해본다. 어제 그 자리다.
 
북두칠성은 가을철 북쪽 양자산 위에 걸렸다가 봄이 되면 무갑산 자락으로 옮겨온다. 나는 그새 한 겨울을 난다. 양자산 위에서 무갑산자락까지는 태양의 경로인 황도이면서 내가 가장으로서 걸어온 길이다.

아마도 별들은 날마다 새벽녘 일터로 가는 어리숙한 家長을 지켜봤을 터다. 내가 순응해야할 것에 대해 어떻게 해가고 있는지를...그러면서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래 전이다. 파주에 사는 건축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집은 지붕에 유리로 첨탑을 세우고 등을 달아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건축가는 "가장이 집에 돌아오는 길, 가족들이 평온한 지를 알리는 등불"이라고 설명했었다. 달리 보면 건축가의 등불과 나의 새벽별은 동격이다. 새벽별은 오늘도 내가 가족을 편안히 부양하게 됨을 알려준다.
 
집 마당에서 회사까지는 편도로 75km. 나는 중부고속도로와 올림픽도로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랐다가 되돌아온다. 그것은 바다를 향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도 출렁이는 바다의 한 복판에서 상어떼들에게 작살을 겨누는 것. 내 생존이 그럴거라는 상상이 밀려든다. 그렇게 맞서 나가고 있다는....
 
직장이 있는 여의도는 금융.증권타운과 국회의사당, 방송국이 있는 서울의 중심이다.나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다시 중심에서 변방으로 하루 한번 왕래한다. 그러면서도 전원생활자의 도시 의존 형태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찾지는 못 했다.
 
도시에 경제와 문화, 정치가 집중돼 있지만 나는 거부한 것도 순응한 것도 아닌 모습이다. 이중적이다. 내가 전원에 자리잡을 당시 아파트 문화에 대한 반성과 전원에 대한 동경이 일었다. 반동적인 현상일거다. 그러나 그 반동은 아주 일시적이었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전대미문의 공황이 전원생활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거세한 것이다.
 
13년전 처음 잣나무골에 왔을 때 광주시 전체에 아파트는 2개 단지, 3개동이 전부였다. 아마도 200여가구를 넘지 않았을 거다. 지금은 3번 국도는 물론 오포면 일대에 아파트 숲이 포도송이처럼 세워져 있다. 식당의 경우 곤지암에서 양평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로 10km 이내에는 하나밖에 없었다. 붕어찜과 매운탕을 팔던 식당이었다. 그 집은 땅값이 오르면서 다른 식당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헐려 나갔다. 지금은 지방도변에 식당만 40여개이며, 주유소가 6개다.

사람들이 더욱 밀려와 한 학년에 열댓명이던 초등학교도 이제는 30여명이 넘는다. 공장과 편의점, 각종 시설들이 늘었다. 주변 마을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고, 전세값도 치솟았다.

그런데 지금은 또 사정이 달려졌다. 탈 도시 행렬이 멈춘 대신 탈 전원이 늘어나고 있다. 나도 아내도 가끔씩 탈출을 논의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물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주변의 몇 사람은 다시 찾아온 공황에 도시로 귀환했다. 김양구씨도 올 봄 귀환행렬에 몸을 실었다. 그는 관세청 공무원 35년을 지낸 은퇴자다. 여주 산북의 양자산자락에 살았다. 그가 3년전에 지은 대지 120평, 건평 35평 규모의 벽돌집은 최근 1억5000만원에 팔렸다. 예전부터 보유중인 분당 32평 아파트로 돌아간 것이다.

그와 나는 지역내 골프 동호인 모임에서 만났다. 모임에는 박변호사, 황약사, 왕형님, 지역 토박이인 이대왕형, 군인 출신인 달수형 등 10여명이다. 내가 모임의 막내다. 그 중 왕형님은 일흔 일곱이고, 황약사는 일흔넷이다. 나는 다들 '형님'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뻘이 되는 왕형님에게도 마찬가지다.

양구씨가 전원생활을 접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전원생활 비용이 도시보다 더 든다는데도 이유가 있다. 어쨌든 그의 귀환은 남의 일같지 않게 다가왔다. 우선 고비용화된 전원생활, 출퇴근거리, 아이들 학교, 교육 여건, 편의시설 등 생활을 지원받거나 영위하기 위한 조건들이 더욱 악화된 상태다.

요즘 들어 아내는"도시로 돌아가자"는 권유가 늘었다. 비용도 갑절이나 늘어 쉽게 버티기가 만만치 않다. 도시로의 귀환을 재촉하는 경우는 이런 것 말고도 많다.
 
이웃 마을에 살던 동문부부도 지난해말 도시로 돌아갔다. 대학 4년동안 함께 공부했던 부부다. '脫 전원'행렬에 끼기까지 동문부부는 십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기름값이 폭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서울 평창동에 빌라 32평을 구해서 돌아간 이후 동문부부와 아이들은 주말마다 몸살을 한다고 들었다.

간혹 초등학생인 동문부부의 작은 딸은 혼자서 버스를 타고 옛 친구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이 떠날 때 늘그막에 다시 올거라고 기약하기는 했으나 정말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또 얼마전 전원생활하는 한 부부가 파경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수년동안을 생활해왔음에도 적응이 쉽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들은 간혹 전원생활의 고참격인 내게 고민을 토로했었다. 나는 "둘이서 새로운 변화를 꾀해보라. 그리고 힘내라"고 응원하는데 그쳤다.

그 때 그들을 도시로 돌아가게 했으면 좋았을 걸...후회막급이다.
전원에서 길을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른다. 나도 그것이 두렵다. 비싼 댓가를 치루며 여기 있기보다는 도시로 나가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하루 여러차례 든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 모습도 안쓰럽다. 새벽부터 일어나 마을버스 타고 또 걷고, 등하교마저도 쉽지 않다.
 
한 계절이 오고, 또 계절이 간다.
별들이 계절을 데려고 간다.
친구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다들 어디로 가는걸까."

이른 새벽, 오늘도 별이 빛난다.
 
"북극성이 사라지기전에는 절대로 길을 잃지 않으리라"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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