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좌우 이념 너머 생존의 정치학
"자유가 뭔지 알아? 두려움이 없는 거야. 빌어먹을 톰 크루즈처럼."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카를로스(베니시오 델 토로)의 이 대사로 요약된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미국식 자유주의의 허세이자, 좌우 진영이 똑같이 추앙해온 '두려움 없는 인간상'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다.
앤더슨 감독은 '매그놀리아(2000)'에서 함께했던 크루즈의 이름을 소환했다. 당시 크루즈가 남성성과 성공 신화의 붕괴를 상징했다면, 이번 영화에서 크루즈는 여전히 두려움을 부정하는 인간의 잔상이다. 앤더슨 감독은 묻는다. 그토록 자유를 외치던 인간들이 왜 겁을 먹었냐고.
이념을 벗겨낸 인간의 초상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가와 군인의 대립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념보다 인간의 본능을 파헤친다. 흑인 여성 혁명가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백인 남성 장교 록조(숀 펜)는 처음에 좌우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로 충돌하면서 육체의 결합으로 변화한다.
혁명은 욕망과 결탁하고, 권력은 성으로 드러난다. 앤더슨 감독은 격렬한 관계를 통해 모든 이념의 뿌리가 인간의 쾌락과 권력욕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진보든 보수든, 혁명이든 제국이든 결국 자기 욕망을 합리화한 언어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정치의 얼굴은 뜨거운 이상이 아니라, 본능의 확장이다.
그 이면에는 가족이 있다. 아버지 밥(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실패한 혁명가, 어머니 퍼피디아는 도망친 전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자란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는 세대의 짐을 짊어진 인물이다. 앤더슨 감독은 '혁명가의 딸'을 앞세워 이상은 가정을 버릴 때 시작되지만, 진실은 가정을 다시 세울 때 나타난다고 설파한다. 퍼피디아는 자유를 외치다가 감금되고, 밥은 폭탄 대신 젖병을 문다. 모든 혁명은 결국 유아기적 욕망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후반부 땅굴을 기어 나오는 밥의 모습은 노골적인 재탄생의 이미지다. 밥은 이념 대신 생존을 택하고, 이는 딸을 찾는 과정에서 완성된다.
좌우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
이 영화는 앤더슨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상업적이면서도 냉소적이다. 좌우 모두에서 상품화된 신념을 비판한다. 혁명가조차 브랜드가 되고, 영웅마저 흥행 공식으로 포장되는 현실을 그대로 비춘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인물은 윌라의 행방을 몰라 헤매는 밥뿐이다. 딸을 대피시킨 조직이 "지금 몇 시죠(What time is it)?"라고 재차 묻지만 약속된 암호를 대지 못한다. 그 질문은 관객에게 되돌아온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혁명도, 자본도, 신념도 모두 무너진 사회. 그 안에는 시간 감각을 잊은 인간들만 남아 있다. 좌우 모두 두려움을 부정하고, 영웅을 숭배하며,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앤더슨 감독은 그 무감각을 시대의 초상으로 삼고, 치열한 싸움 너머에서 인간의 근원을 본다. 진보의 낭만을 '부끄러운 섹스'로, 보수의 질서를 '가학적 쾌락'으로 묘사한다. 하나같이 미숙한 인간들의 초상이다. 자기 언어에 취해 있지만, 동일한 공허함이 흐른다. 카메라는 그 어리석음을 냉소하면서도 연민한다. 인간이 헛된 싸움에서도 성장한다고 믿고 있다.
어두운 희망의 탄생
앤더슨 감독은 이번에도 극단의 결합을 택했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8)'가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결탁이라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진보(퍼피디아)와 보수(록조)의 육체적 교배다. 충돌과 뒤섞임 속에선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혁명과 제국의 피가 섞인 딸 윌라다. 부모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단단하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잔해 위에서 피어난 희망은 밝지 않다. 이념이나 명분, 공동체성보다 생존 본능이 앞선다. 그래서 결말도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의 승리 대신, 밥이 딸과 재회하는 한 장면으로 끝난다. 지치고, 타락하고, 불결하지만 끝내 살아남는다. 진보의 신념과 보수의 질서가 지워온 가장 인간다운 얼굴로.
그 대립의 종착점에서 카를로스의 대사는 돌아온다. "자유가 뭔지 알아? 두려움이 없는 거야. 빌어먹을 톰 크루즈처럼." 앤더슨 감독은 이 말로 21세기의 모든 이념 전쟁을 요약한다. 크루즈는 여전히 건물 외벽을 기어오르지만, 디캐프리오는 땅굴을 기어 나온다. 그게 오늘날 진짜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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