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 주목
트럼프 2기 저항하는 오스카
문화적 다양성에 손 들어줘
3년 후면 100세가 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오랜 기간 한쪽으로 고정된 시선은 영화적 상상력의 범위를 결정하고 비판 정신은 정해진 수위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오스카 트로피의 황금빛 권위가 절대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10년에 한 번 깜짝 선택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본질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이런 아카데미가 확실한 변신을 선언한 것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처음 취임한 2017년부터다.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새로 출범하는 트럼프 정부의 성토장처럼 보였다. 배우들은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ACLU 미국시민자유연맹)의 파란 리본을 달고 레드 카펫에 등장했다.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는 흑인 소년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인종 문제와 성 소수자 이슈를 다뤘다. 이후 오스카의 선택은 메이저보다 마이너를 향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차별과 사랑을 동화처럼 찍은 ‘셰이프 오브 워터’(2018), 인종 문제를 다룬 작은 영화 ‘그린 북’(2019)에 작품상이 돌아갔다. 2020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영어가 아닌 언어로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면서 오스카 역사를 새로 썼다.
트럼프 정부 2기와 함께 시작한 97회 아카데미시상식. “나의 할머니는 1961년 미국에 왔고, 꿈과 성실함을 지닌 이민자의 부모 아래서 성장한 것이 자랑스럽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최초의 도미니카 출신 배우지만 내가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스’로 조연상을 받은 조 샐대나의 수상 소감은 의미심장하다.
10개의 작품상 후보작 선정부터 심상치 않았다. 5개 주요 부문을 휩쓴 ‘아노라’부터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노 어더 랜드’까지 거의 모두 반(反)트럼프 메시지를 담고 있다.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성 노동자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로 사회적 약자에 포커스를 맞춘 독립(다양성)영화다. 베이커 감독은 “그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나와 인생의 경험을 공유했고,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또 “독립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자신의 영화를 인정해 준 오스카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일찍이 할리우드로 진입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계속 ‘작은 영화’를 고집했다. 2015년 ‘탠저린’은 단돈 10만 달러로 만들었으며, 출세작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제작비도 2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이라면 독립영화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현실의 노동’이다. 창작의 고뇌는 풍요함보다 빈곤함에서 꽃핀다는 말을 션 베이커의 영화에서 실감한다.
이번 아카데미의 주인공은 ‘아노라’였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 스포트라이트는 ‘브루탈리스트’에 집중됐다. 강력한 작품상 후보였던 ‘브루탈리스트’는 파시즘으로부터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건축가의 삶을 그렸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행한 건축양식으로 거칠고 투박하며 노출된 콘크리트가 특징으로 재료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축 양식이다. 감독 브래디 코베는 “공감하지 못해서 미움받기 쉬운 브루탈리즘 건축이 이민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며 “화려하면서 웅장하고 기념비적 대도시 건축에 집착하는 트럼프의 편향성이 히틀러와 닮았다”고 비난했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미키 17’ 세계적으로 흥행몰이 중이다. 봉 감독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지는 이 영화에는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 독재자가 등장한다. 저격의 위기를 겪은 후 그의 통치는 더욱 확고해진다. 이 부분이 트럼프를 풍자한 것인가 묻는 말에 봉 감독은 “촬영을 마친 시기가 그 사건 보다 훨씬 더 이전”이라고 말했다. ‘미키 17’은 개봉 시기가 맞지 않아 이번 작품상 후보에서 빠졌다. 내년 아카데미 심사위원은 오스카 변신의 정점을 찍은 봉 감독의 영화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임훈구 디지털콘텐츠매니징에디터 keygri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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