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인문학 독자를 위한 화엄경<5>-'찰나찰나 발심'
초기 화엄교학이 이해한 <화엄경>의 수행은 성불하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일승보살도의 수행이란 곧 불행으로서 "'나'가 온전한 부처님"임을 믿으려는 서원을 일으켜 부처님이 할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서서 '이것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고 안 하고의 문제'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할 일'이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습니다. 다만 제 표현력이 부족하여 달리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굳이 오해의 소지를 무릅쓴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을 어떤 고정되고 성취될 수 있는 단계, 존재, 상태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화엄경>의 부처님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따로 있어서 부처님의 행, 즉 불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태를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불행이라고 생각하며, 중생이라고, 보리수라고, 또는 제바달다라고 분별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 하나, 그렇다면 "'나'가 부처님"임을 믿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십주의 처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미 초발심했으니 그 이후는 초발심이 아닌 불행이기만 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초기 화엄교학은 찰나찰나 발심(念念發心)으로 이해합니다. 즉 초발심 이후 보살은 매 찰나찰나 믿으려는 의지, 서원을 끊임없이 일으킵니다. 이것이 곧 불행입니다. 앞서 소개한 머리와 다리가 하나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같다면 첫 발심이 곧 끝 발심이며 이를 찰나찰나 발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흔히 '초심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초발심을 십주의 첫 주에 묶어 놓고 현재의 자신을 초심과 분리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화엄경>의 보살은 항상 초심일 뿐이니까요.
초심, 이 자리는 중생은 들어온 적 없으며 보살은 머무르지 않고 부처님은 나가지 않으시는 자리입니다.
-박보람, <인문학 독자를 위한 화엄경>, 불광출판사, 1만6000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