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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난 사람]'미생' 집필 후 '완생' 순간 많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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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작가가 꿈은 아니었어
신기하게 시험 보면 다 합격
'미생' 열풍에 혼란스러워 "왜요" 반문
생각 단단히 심을 내공 생겨

[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사회적 현상으로 기록되는 드라마가 있다. 1990년대에 드라마 ‘모래시계’가 선풍적 인기를 넘어 열풍을 일으키면서 방송 시간의 거리를 한산케 했다면, 2000년대에는 드라마 ‘미생’이 조기 귀가한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드라마가 일으킨 파장은 깊고 넓었다. 사회초년생들은 신입 4인방의 고군분투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위로받았고, 중년의 직장인은 오 과장과 선 차장 등이 맞닥뜨린 사회의 엄혹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야”라는 대사는 아포리즘의 반열에 올라 오래도록 회자됐다. 술에 의지한 걸 후회하면서도, 술 때문에 직장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다는 천 과장의 토설에 잠시나마 직장인의 음주에 면죄부가 부여됐다. 적잖은 남편들이, 아주 오랜만에 자신을 이해한다는 듯 사랑스레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을 목도했노라고 고백했고, 많은 이들이 웃음 지었다. 종영한 지 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미생’의 생명력 있는 대사가 대본집으로 출간됐다. 한 시대에 굵은 획을 그은 주인공 정윤정 작가의 이야기를 지난 17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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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본집에서 “왜 드라마 작가가 됐는지, 어떻게 됐는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여전히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렬하게 원했다기보다는 결국 그 길로 가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가 꿈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대비 없이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왔다. 당시 저는 지독한 활자 중독자였기에 시력 2.0인 눈으로 보이는 모든 글자를 찾아 읽었는데, 어느 날 TV 광고 하단에 옆으로 흐르는 광고 자막을 읽던 중 방송작가 교육생 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그렇게 구성 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신기하게 응시하는 족족 합격했다. 처음 해 보는 꽁트 대본 쓰기(1차 시험), 드라마 감상평 작성(2차 시험)에 단번에 합격한 게 믿기지 않아 타 방송사에 재응시했는데 그것도 합격하더라.


- 소질을 발견한 건가.

▲당시 ‘찰스 브라켓의 시나리오 10훈’을 한 주에 하나씩 배웠는데, 생소한 내용인데도 무슨 말인지 다 이해가 되더라.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처음 느낀 경험이었다. 재미있었고 결과도 좋았다. 선생님으로부터 학생 마흔 명 중 유일하게 “가르친 보람을 느끼는 학생”이란 칭찬을 들었다. 서른아홉 명 시청자에게서 서른 아홉개의 호평을 듣기도 했다. 다만 당시에는 그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했다. 심지어 ‘배운 대로 썼을 뿐인데 왜 칭찬하는 거지’라고 의아해했다. 어렵게 찾은 ‘방향성’을 ‘방황성’으로 바꿔 이후 오래도록 오리무중의 시간을 보냈다.

- 방황이라면, 바로 작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는 건가.

▲작은 편집광고대행사에서 기획자이자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처음엔 기업 사보와 지면광고 업무를 하며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금방 지치더라. 특유의 무관심으로 상품과 브랜드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홍보 기획이나 CI(기업 이미지 통합) 제작 업무를 할 수 있었겠나. 결국 9개월 만에 퇴사했다. 이후 아는 선배의 권유로 방송 구성 작가 일을 시작했다. 15년간 동시에 네다섯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바쁘게 지냈다. 당시 웬만한 홍보 영상 원고 작업은 다 해봤는데, 그때 본인만 자신이 사기꾼인지 모르는 사기꾼들도 정말 많이 만났다.


- 드라마에 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이상하게 기회만 주어지면 바로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실제로 작가 생활 15년 끝에 기회가 주어져 그냥 썼는데, 진짜 써지더라. 심지어 잘 써졌다. 그렇게 탄생한 드라마가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이다. 앞서 말했듯 원했다기보다는 그렇게 될 것 같은 생각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은 종종 시그널을 보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그거야’, ‘지금이야’와 같은 시그널을 잘 캐치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웰메이드 드라마로 기억되는 ‘미생’이 방영한 지도 벌써 9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사람이 ‘인생 드라마’로 손꼽으며 여운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미생’ 방영 당시 알 수 없는 불행감을 느꼈고, 대단한 성공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않으려고 애썼다고 했다.

▲감사한 일이다, 다만 제 작품이 누군가의 인생 드라마가 되는 건 기쁘면서도 몹시 두려운 일이다. ‘미생’ 드라마는 하나의 현상이 될 정도로 반향이 컸지만, 저는 어떻게든 그 반향 밖에 머무르려 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잠식됐다. 그 이유를 최근에야 알았는데, 그건 내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려본 적 없는 큰 성취에 몹시 당황하고 불안해했다. 그 과정에 참 많은 걸 잃었다. 스스로 이룬 성취의 가치, 호감을 표하는 대중의 진심을 외면했다. 심지어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반문했다. 사람들은 겸손인지 위선인지 혼란스러워했다.

- 9년 전과 지금은 달라졌나.

▲그렇다. 이번 출간 작업은 정말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버려뒀던 대본들을 하나하나 찾아 처음부터 보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면 미안해지더라. 나에게 “애썼다, 잘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말해줬다.


- 웹툰 원작을 영상화하는 과정에 공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 안다.

▲웹툰을 드라마화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원작 속 행간의 의미를 어떻게 드라마로 실어 나르느냐다. 웹툰 속 컷과 컷 사이 세계는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상상과 해석이 숨어 있다. 다수의 지지와 공감을 얻는 해석을 담아낸다고 해도 누군가는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기에 조심스러웠다. 대본 역시 20화의 대서사를 채우기 위해 원작 속 모든 요소의 확장이 필요했다.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변형·왜곡하지 않기 위해 깊이 고민했다.


- 작가로서 유달리 머뭇거렸던 부분이 있었나.

▲장그래다. 드라마를 한 줄로 정의한다면 ‘주인공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려운 과정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초반에 주인공이 어떤 목표를 갖고 있으며, 무엇을 하려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들이 응원하면서 따라갈 수 있다. 목표가 직관적이고 강력할수록 이야기가 힘 있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어려웠다. 바둑을 포기하고 원인터에 들어온 장그래에게서는 20화를 끌고 나갈만한 능동적인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버티고 살아남는 것으로 수렴했는데, 이것도 문제였다. 살아남기가 목표라면 그러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시청자의 응원을 끌어내야 하는데, 20화를 이어가려면 주인공을 움직여야만 했고, 그러자면 극성이 강해지면서 원작의 정서가 사라지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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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미생’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캐릭터 매력이 돋보였다는 평을 받는다.

▲제 마음 속에는 서랍이 있다. 서랍에는 살면서 경험한 수많은 경험이 사유와 가치판단을 거쳐 구분돼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것들이 숙성돼 각양각색의 사람이 탄생한다고 느낀다. 이때 캐릭터는 ‘나’라기 보다는 ‘내가 잘 아는 (혹은 알 법한)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까지 이어진다. 그럼 판타지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그래와 오 차장이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이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저런 상사가 어딨어? 저런 부하직원이 어딨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 드라마 성공의 필수 공식처럼 여겨졌던 로맨스가 없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로맨스 하나 없이 성공한 작품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장백기와 강 대리, 안영이와 하 대리, 그리고 장그래와 오 차장의 관계성을 통해 남녀 간의 로맨스는 없어도 로맨스감은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 ‘미생’이 종영한 지 9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사이 어떤 변화와 발전, 곡절을 겪었나. 정윤정 작가의 미생(아직 완성되지 않은 삶)은 완생에 가까워졌나.

▲완생의 순간이 많아졌다. ‘미생’ 이후에 쓴 ‘하백의 신부 2017’ 이나 ‘아이돌-더 쿱’ 같은 작품들 안에 작가의 생각을 더 단단하게 심을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일단 제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인지가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미생’만큼 대단한 후속작이 나오진 않았지만, 제 글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분명해졌다. 이유야 어찌 됐든 ’미생‘의 성공에도 부화뇌동하지 않는 모습에 감동(?)해 저를 믿어주는 분들이 많아졌고, 저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내면도 더 단단해진 느낌이랄까.(웃음) 그렇다고 대박을 원하는 건 아니다. 인생에서 대박은 한 번이면 된다. ‘미생’은 그런 기회를 제게 줬다. 지금은 많은 이들의 응원 속에 쓰고 싶은 걸 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게을러지는 몸뚱이를 다그쳐 좀 더 열심히 쓰는 것이다.(웃음)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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