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우리 사회는 정부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때로는 지나쳐 보인다. 물론 정부가 우리 사회의 곳곳에 돌봄의 손길을 펼치고 더 효율적으로 관리해 나갈 필요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민으로서 공동체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 지 필자가 최근 근무한 영국 이야기를 해보면서 한번 짚어보자.
필자는 첫 여성 주영국 한국대사로서 찰스 왕세자의 초청으로 왕세자재단 관리하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덤프리하우스 저택에서 하루를 잔 적이 있다. 덤프리하우스는 원래 덤프리백작가문 소유로 18세기 치펜다일 가구들로 채워져 유명한 저택이다. 오리지널 치펜다일가구는 전세계에 120여점뿐이라니 이 저택내 70여점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현대에 들어와 방대한 저택과 영지를 유지하기가 용의치 않게 됨에 따라 2007년 치펜다일 가구들이 경매에 부쳐져 전세계로 흩어질 운명에 처하게 되자 덤프리저택과 가구의 문화유산으로서의 일체성을 유지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경매 직전 찰스왕세자재단에서 나서 시민모금운동으로 경매를 중단시키고 덤프리저택과 가구를 살리는데 성공하게 된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문화유산을 시민들이 나서 구했다는 점에서 끝나지 않고 이 영지는 관광숙박업, 농지 경작, 직업훈련소 및 주민복지센터 건립을 통해 인근주민들의 삶터이자 일터로 변신하여 쇠락해가던 시골동네 3000여명의 주민을 고용하는 직업창출과 평생교육의 장으로 모범이 되고 있다. 필자가 이를 소개하는 것은 영국을 지탱하는 힘, 사회의 진정한 기둥이 왕실도 귀족도 아닌 시민들의 소중한 것들과 지켜야할 것들에 대한 관심과 참여 그리고 기여인 점을 느껴서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성과 영지, 오래된 교회 등 문화적 가치가 높은 자연과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어느 나라보다 먼저 시작한 나라다. 유지가 어려운 수많은 성이 외국에 팔려가는 이웃 프랑스와 달리 일찌감치 1895년에 자연 문화 유산을 관리하는 내셔널트러스트(The National Trust)를 시민의 힘과 재정적 기여로 설립한 나라다.
놀라운 점은 영국의 방대한 자연 문화 유산을 보전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정부기관이 아니라 자선단체라는 사실이다. 설립자들은 영국의 유산을 보전해야 할 뿐 아니라 자연과 아름다움 그리고 역사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선단체를 설립하고 유럽 최대의 자선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민간의 노력을 보완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잉글리시 헤리티지를 설립했는데 이 기구 또한 자선단체로 바뀜에 따라 영국은 문화재 보호와 전 세계 시민에 개방 운영을 완전히 시민들의 손에 맡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좋은 소식이 있다.
영국도 세계화의 부작용, 양극화, 비효율,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문제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고 여기에 더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파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막상 영국에서는 긴장감이 덜하고 안정감이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필자는 런던의 홈리스는 상대적으로 덜 공격적이고 평화롭다고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한다. 왜일까. 상대적으로 돌봄과 나눔의 문화가 더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코로나19가 런던을 강타하고 봉쇄 명령이 떨어졌을 때 대사관저를 포함한 동네 모든 집의 정문에 노란 쪽지 하나가 걸렸다. 먹거리 사야 하거나 필요한 일을 주민 봉사단에 연락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주겠다는 따뜻한 안내문이었다.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주민을 위한 봉사단이 즉시 구성돼 서로 돌보는 문화가 있어 수차례에 걸친 봉쇄에도 런던은 평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약자에 대한 돌봄과 자연과 문화재 같은 공공재에 대한 돌봄은 모두 시간과 정성과 돈이 필요한 일이다. 돌봄과 나눔이 함께 붙어 있는 이유다. 정부에만 모든 것을 기대지 말고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돌봄과 나눔을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 사회도 더 살 만하고 지속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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