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기업 길들이기와 원산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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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초희 기자] 얼마 전 주말에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중 반가운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던 동네 양아치 네 명이 난데없이 라면을 먹다 동네 주유소를 터는 코미디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이었다. 1999년 당시에는 신인이었던 이성재, 유오성의 과장된 연기가 조금은 오글거렸지만, 복잡하기 그지없는 요즘 영화들보다 단순무식 그 자체의 순수한 슬랩스틱이 주는 쾌감은 여전했다.


영화에서 가장 압권은 극 중 무식하고 힘센 캐릭터 ‘무대뽀’를 연기한 유오성의 전매특허 대사 "대가리 박아"였다. 그 때는 마냥 웃으면서 봤지만 지금 보니 이 장면 심상치 않다. 권위를 시원하게 부숴 버리는 카타르시스는 통쾌했다. 하지만 주유소 사장과 청소년 아르바이트생 등 몇 안 되는 포로들 앞에서 한껏 위세를 부리는 그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인 폭력적인 서열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여성과 달리 남성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흔한 경험 중 하나가 ‘원산폭격’이라고 들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이나 대학생 때, 선생님이나 선배들의 흔한 체벌 중 하나였고, 군대에 가서 진짜 ‘오리지널’을 해보니 제법 버틸만하더란 동료 얘기도 생각난다. 친구들과 대화 중 호기심에 해보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던 ‘웃픈’ 기억도 있다.


대가리를 박는 행위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신체 부위 중 가장 위에 있는 머리를 상대의 발 앞에 거꾸로 찍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모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국 사회 인간관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권력의 우위를 따져 서열을 정하는 것. 소위 '얼차려'는 상급자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게 아닐까 싶다.

머리를 땅에 대는 행위와 관련,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은 영화 남한산성에서 실감나게 표현됐던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의 임금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며 삼전도에서 세 번 절을 하고 한 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찧었던 굴욕의 인사법이다. 상대의 머리를 땅에 박도록 하는 행위는 권력자가 상대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수단인 것.


주유소 습격사건의 최고봉은 영화 후반부, 온통 기름 바닥이 된 주유소에서 유오성이 라이터를 치켜 들며 장내에 엉켜있던 수십 명에게 '대가리 박기'를 명령하는 장면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보니 무대뽀의 모습은 언뜻 소설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과도 겹쳤다.


형태만 달리 할 뿐 ‘대가리 박기’는 지금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최근 재계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지난 5년 만큼 힘들었던 적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문재인 정부 내내 사흘에 한 번 꼴로 기업들을 옥죄는 법안이 쏟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했던 "붉은 깃발(마차업자 보호를 위해 차 속도 통제)을 치우겠다"는 공염불이 된 지 오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주주대표소송제 등 혁신은 외면한 채 기업 활동만 제한하는 ‘과잉입법’은 각종 부작용과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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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뀔 때 마다 재계 군기잡기는 늘 반복돼 왔다. 뒤바뀐 정치권력의 지형도를 눈 앞에서 확인시키듯 기업들을 줄세워 한바탕 으름장을 놓는 것이 정치권력의 생리다. 대통령 선거가 코 앞이다. 선거를 앞두고 친기업, 친경제 행보를 내세우는 대선 후보들의 모습은 한결같다. 물론 이를 마냥 믿는 기업인들은 이제 없다. 불확실성이 큰 만큼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머리를 박게 할 지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 재계의 속내다.


이초희 기자 cho77lov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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