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라비린스와 공급망 실사법
이탈리아 중부지방에는 이름난 중세도시가 많다. 그중에서도 피렌체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시에나는 도시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지금 시청사로 쓰이는 푸블리코 궁전은 88m가 넘는 종루와 대형벽걸이가 잘 알려져 있다. 14세기에 만든 태피스트리에는 좋은 정부는 법질서를 확립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잘 경청하며 농촌이 잘 사는 사회라고 그려져 있다.
시에나 대성당에 있는 동심원 모양의 미로(Labyrinth)는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하다. 그리스 신화 속 크놋소스 궁전에 있었다는 이 미로는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으로 ‘고난의 길’, 때로는 ‘성스러움’을 상징한다.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라비린스는 인생은 미로와 같아서 신앙에서 지혜를 찾으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최근 ESG 열풍이 지속되는 가운데 독일에서는 지난 6월 공급망 실사법(LkSG)이 통과됐다. 이 법에 따르면 대기업은 공급망(supply-chain)에 있는 협력기업들의 인권침해나 환경오염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고, 사후에 시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23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이 법은 독일 국내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수출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법이 만들어진 과정이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2014년 채택한 비재무정보공개(NFRD) 지침에 따라 2016년 12월까지 국내법을 정비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기업 간의 의견대립을 극복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논의과정이 필요했다. 경쟁국가인 영국(2015), 프랑스(2017), 네덜란드(2020) 등이 유사한 국내법을 만들었으나 독일은 의견수렴을 위해 일정을 수 차례 연기했고 금년 6월이 돼서야 통과시켰다.
공급망 실사(due diligence)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종업원 3000명 이상 대기업은 △공급망에 있는 협력사의 리스크 관리 △공급업체 인권?환경에 대한 정기적 리스크 분석 △공급업체에 대한 인권침해 및 환경규정 위반 방지를 위한 점검을 해야 한다. 2024년부터는 종업원 1000명 이상의 기업에도 적용된다.
길고 복잡한 논의과정에서 기업들의 인식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대기업은 이 법안이 도입되면 비용부담이 늘어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 생각했다. 협력사의 리스크까지 본사가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새로운 기회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ESG라는 관점에서 투자를 받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협력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 판단했다. 협력사의 의견도 충실하게 경청했기에 가능한 의사결정이었다.
라비린스는 사람의 귀를 뜻하기도 한다. 달팽이관이 미로처럼 생겼기 때문이지만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균형 있게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도 담고 있다. 독일 공급망 실사법의 입법과정을 보노라면 정부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업의 의견을 듣고 해법을 찾아가는 자세가 돋보인다. 시에나의 벽화와 미로는 좋은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들고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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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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