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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갈팡질팡 본드…명분·매력 다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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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크레이그 마지막 '007' 에피소드 '노 타임 투 다이'
작위적 설정·비약적 감정 난무…'여왕 폐하 대작전'과 대조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컷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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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노 타임 투 다이'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007' 에피소드다. 대미는 죽음으로 장식된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희생이다. 넋을 기리며 루이 암스트롱의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우린 시간이 충분히 있어)'가 흐른다.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Just for love(그저 사랑을 위해)/Nothing more, nothing less(덜도 더도 아닌)/Only love(오직 사랑을)."

조지 라젠비가 주연한 '007 여왕 폐하 대작전(1969)'에서 먼저 사용된 노래다. 여느 에피소드와 달리 낭만적인 로맨스로 가득하다. 본드는 첫 등장 신에서 해변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트래시(다이아나 릭)를 구한다. 매복한 폭력배들을 물리치는 사이 트래시는 유유히 사라진다. 본드는 카지노에서 그녀와 조우해 사랑을 나눈다. 블로펠트(텔리 사바라스)의 생화학 연구소를 폭파해 임무를 완수하고는 결혼까지 골인한다. 트래시는 신혼여행 길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그녀를 부여잡고 슬퍼하는 본드. 총소리를 듣고 따라온 경찰에게 말한다.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


영화 '007 여왕 폐하 대작전' 스틸 컷

영화 '007 여왕 폐하 대작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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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의 본드도 못잖은 순정마초로 그려진다. 시작부터 매들린(레아 세이두)과 뜨겁게 사랑한다.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본드가 옛사랑인 베스퍼(에바 그린)의 무덤에서 폭탄 테러를 당한다. 악당에게 매들린이 스펙터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정리해버린다. 매들린을 억지로 열차에 태우고는 다신 보지 말자고 한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은 이 장면에 빌리 아일리시가 부른 주제곡 'No Time to Die'까지 삽입하며 서정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관객은 본드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전작 '스펙터(2015)'에서 매들린이 스펙터 일원인 미스터 화이트(예스퍼 크리스틴센)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새롭게 밝혀지는 비밀 따위는 없다.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이별이다.


후쿠나가 감독은 본드의 퇴장을 그리스 신화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죽음처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헤라클레스는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가 부과한 열두 가지 과업을 달성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다. 매번 어려운 미션을 수행하는 본드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본드의 미션은 외부로 유출된 MI6의 '헤라클레스 프로젝트' 수습. 특정한 유전자 배열을 가진 사람만 골라 죽일 수 있는 진일보한 나노봇 기술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무기가 나온다. 네소스가 숨을 거두며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라에게 건넨 자신의 피다. 식어버린 사랑을 되살리는 힘이 있으니 남편이 변심하면 옷에 발라서 입히라고 한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컷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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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소스는 데이아네이라를 겁탈하려다 헤라클레스가 쏜 히드라의 맹독이 발라진 화살을 맞고 죽는다. 이를 몰랐던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로 쳐들어가서 이올레 공주를 데려오자 남편 옷에 네소스의 피를 바른다. 독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 헤라클레스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헤라클레스가 이올레 공주를 데려온 건 에우리토스에게 복수하고 빼앗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노 타임 투 다이' 속 본드에게 이런 명분은 없다시피 하다. 새로운 악당인 사핀(라미 말렉)부터 스펙터를 괴멸하고 본드와 대립각을 세우는 배경과 동기가 옅다. 작위적 설정과 비약적 감정만 난무해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무의미해진다. 구색 맞추기에 가까운 서사에서 본드는 특유 매력마저 잃어버린다. 순정마초로 포장된 '007 여왕 폐하 대작전'에서도 그는 바람기가 다분하고 능청스러웠다. 사고를 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성의 우둔함을 유연하게 보여줬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컷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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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트래시와 결혼한 건 산전수전을 함께 하며 애정이 깊어진 까닭이었다. '노 타임 투 다이'는 도입부터 진한 로맨스를 보여주나 그 회복 과정을 피상적으로 그리기 바쁘다. 갑작스러운 딸의 등장이 대표적인 예. 이전의 맹위도 사라진 지 오래다. 새로 007 번호를 부여받은 노미(라샤나 린치)가 툭 하면 얕잡아 볼 만큼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크레이그가 일찍이 '007' 시리즈에 이별을 고할 만하다. We Don't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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