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한국유사] 고대 전쟁터…칼 베인 상처에 자석, 동상엔 머리카락 썼다
전쟁이 발발하면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일이 사망자를 매장하고, 부상자를 입원시켜 치료할 시간이 부족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의약품 공급도 차질을 빚게 된다. 따라서 응급처치법이나 응급구호품이 자주 사용된다. 고대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부상은 적군의 무기에 다치는 경우다. 적군의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거나 화살에 맞아 생기는 부상이 흔했다.
고대 근동(近東) 지방의 히타이트(Hittite)인들은 철광석을 고온에 녹여 양질을 철을 분리해내는 방법을 알았다. 철기 제조술은 점차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나갔고, 철기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전쟁은 대규모화되었다. 이에 따라 부상자의 규모도 급속히 커졌다. 칼, 창, 화살촉은 대부분 철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부상을 입을 경우 금창(金瘡)이 발생한다.
조선 의학서 '향약집성방'에 따르면
자석을 가루로 만들어 상처 치료
조선 전기에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따르면 쇠붙이에 상해서 아플 때는 말발굽을 태워 가루를 낸 후 그것을 술에 타서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무기에 몸이 상했을 때는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온다. 출혈이 심할 경우 과다출혈로 사망하기도 한다. 자석(磁石)을 가루로 만들어 바르면 아픔이 사라지고 피도 멎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쇠붙이에 상해서 창자가 튀어나왔을 때는 먼저 가루로 만든 자석, 곱돌, 쇳가루를 섞어 창자에 뿌린다. 그다음 자석 가루를 먹으면 창자가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전근대시기 자석이 응급처치약으로서 상처 치료에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669년 1월, 당나라는 승려 법안(法安)을 신라로 보내 자석을 요구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바로 다음해의 일이다.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자석의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신라는 그해 5월에 급찬 기진산(祇珍山)으로 하여금 자석 두 상자를 당나라로 가져가게 했다. 얼핏 당의 자석 요구와 신라의 자석 상납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자석은 두 상자에 불과했다. 수만 명의 부상자를 치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그리고 중국 하북(河北) 지방에는 ‘자주(磁州)’라 불리는 자석 전문 생산지가 따로 있었다. 당나라가 자석이 부족해서 신라에 요구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669년은 나당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이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당의 법안과 신라의 기진산은 기본적으로 외교사절이었지만, 자석을 구실로 상대국의 상황을 정탐하고자 했던 것이다.
계절적 요인으로 인한 부상도 많아
여름엔 이질·전염병에 취약
겨울에는 동상 걸리기 십상
적군의 무기를 통해 직접 입는 부상 외에도 환경적·계절적 요인으로 인한 부상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병사들은 여름에 이질(痢疾)이나 전염병에 취약했고, 겨울에는 동상(凍傷)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그 절반은 동상 환자였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방한복이나 방한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동상 환자는 더 많이 발생했다. 7세기 동상과 관련된 기록이 삼국사기-권7-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 잘 드러나 있다.
"(문무왕 2년) 정월에 유총관(劉摠管)은 신라의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 방면으로 군량(軍糧)을 수송하게 되었다. 그때 음우(陰雨)가 달을 연하여 오고, 풍설(風雪)은 지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다. 운송 중인 군량을 채 전달하지도 못했는데, 당군은 귀환하려 하였다. 신라의 병마(兵馬)도 양식이 다하여 회군할 때, 병사들이 주리고 추워서 손발에 동상이 걸려 길에서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당은 이듬해인 661년에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평양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평양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당군의 군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혹독한 겨울 추위가 닥쳤다. 어쩔 수 없이 당의 소정방은 신라에 군량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백전노장 김유신은 자청하여 군량 수송에 나섰다. 김유신은 662년 정월에 수레 4000대에 군량 2만석을 싣고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전달한 것은 군량뿐만이 아니었다. 군량 외에 은(銀) 5700푼, 세포(細布) 30필, 두발(頭髮) 30량, 우황(牛黃) 19량을 전달했다. 은과 세포는 소정방 개인에게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두발과 우황은 의약품이다. 우황은 신경 안정제로 잘 알려져있는데, 두발 즉 머리카락의 존재는 흥미롭다.
고려 의학서 '향악혜민방'에는
머리카락 이용한 동상 치료법 소개
돼지기름 연고처럼 만들어 쓰기도
고려시대에 편찬된 향약혜민방(鄕藥惠民方)에는 머리카락을 이용한 동상 치료법이 소개되어 있다. 겨울에 발이나 발뒤꿈치가 트거나 터져 끊어질 듯한 증상이 보이면 머리카락 한 줌과 오동나무씨 기름 한 사발을 푹 삶는다. 오동나무씨 기름이 마르고 머리카락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식으면 질그릇에 담아둔다. 이를 트거나 터진 발뒤꿈치에 붙여주면 곧 편안해지고 병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겨울철 전투로 인해 동상 피해를 입은 병사들에게 유용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동상 치료에는 동물성 기름도 많이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저고(猪膏)’라는 용례가 확인된다. 돼지기름을 이용해 연고처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다. 동물성 지방을 술(알코올)에 넣어 열을 가해 달이면, 지방산과 알코올이 반응해 에스테르(Ester)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화장품, 연고, 비누 등의 원료가 된다. 근대에 포경(捕鯨) 산업이 발달해 고래 남획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04년 9월29일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의 어부였던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독도에 대한 영토 편입을 청원하면서 강치의 유용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가죽을 소금에 절이면 소가죽 대용이 되어 제법 수요가 많아지고, 신선한 지방에서 채취한 기름은 품질과 가격 모두 고래 기름에 뒤지지 않습니다. 찌꺼기는 충분히 짜면 아교의 원료가 될 수 있고, 고기는 가루로 만들면 뼈와 함께 귀중한 비료가 될 수 있다는 것 등을 확인하면, 이 섬의 강치잡이는 대략 장래성이 있습니다."
독도의 강치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급속히 줄어들었고, 광복 후 오래지 않아 절멸되었다. 당시 일본 시마네현 어민들은 독도에 출항해 강치를 잡아 가죽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았고, 강치 기름으로 연고를 만들기도 했다. 강치 기름으로 만든 연고는 상처나 화상 그리고 겨울에 손발이 틀 때 주로 사용했다. 강치 기름에는 인체에 유익한 여러 종류의 지방산이 포함되어 있는데, 오메가(Omega)-3가 20~25%를 차지하고 있다. 혈액순환과 피부질환 개선 등에 효능을 보이며 체내에 빠르게 동화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편 머리카락의 주 성분은 케라틴(Keratin)으로 18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케라틴은 머리카락, 손톱, 피부 등 상피 구조의 기본을 형성하는 단백질로 체내에 빠르게 동화된다.
사실 자석이나 머리카락을 이용한 치료법이 근본적 치료가 되기는 어려웠다. 근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상처가 덧나거나 세균 감염의 위험성이 높았다. 다만 여러 동양 의학서에서 이러한 약재들의 유용성을 언급한 점을 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플라시보(Placebo)와 같은 심리적 효과가 더 컸을지도 모른다.
국가의 전사자나 부상자에 대한 처리는 병사들의 사기 문제와 직결된다. 내가 죽거나 다치더라도 조국이 반드시 구해준다는 믿음이 있을 때 사기가 올라가는 법이다. 조국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다고 느낄 때 자신도 기꺼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경우 부상 치료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병사들의 사기 문제를 고려해 당시에도 중시되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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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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