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열심히 했더니 점수 오르네…'노동의 게임화' 올까 [임주형의 테크토크]
노동자 동기 부여 위한 '게임화' 도입
작업 진척도 점수화하고 보상 주는 방식
美 아마존 등 일부 테크 기업서 시범 도입
노동자 감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전문가 "노동의 질도 고려한 근로 환경 고민 있어야"
[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미래의 한 공장형 기숙사. 근로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본뜬 가상 캐릭터를 지급 받고 마치 온라인 게임을 하듯이 캐릭터를 육성합니다. 하루 노동한 급여는 이른바 '게임 머니'로 지급되는데, 이 게임 머니를 이용해 캐릭터를 치장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의 유일한 낙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유명 공상과학 드라마 '블랙미러' 에피소드 중 하나로, 점차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을 한 대가로 게임 캐릭터를 꾸미는 가상 화폐를 받는 장면은 시청자들로부터 "섬뜩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노동의 게임화'는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게임화를 도입하는 기업들은 이로 인해 노동 생산성이 늘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근로 환경을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게임화(Gamification)는 일반 환경에 게임의 요소를 투입, 몰입도를 높이는 방법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 프로그램에 문제 풀이 게임을 도입해 학생들의 이해도를 높이는 등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노동에도 게임화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습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IT 매체 '인포메이션' 보도에 따르면, 세계 최대 물류 기업인 아마존은 미국 내 물류센터 40곳에 '게임화 프로그램'을 시범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임화 프로그램은 자발적으로 지원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는데, 이들은 앞으로 업무를 할 때 일종의 '미니 게임'을 동시에 진행하게 됩니다.
미니 게임의 대표적 사례는 '미션레이서(Missionracer)'라 불리는 게임으로,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각각 가상의 스포츠카에 타 경주를 펼치는 내용입니다. 물류센터는 각종 센서와 소프트웨어를 이용, 게임에 참여한 노동자의 작업 진척도·걸음 빠르기·노동 시간 등을 취합해 차량의 '속도'를 높이거나 늦춥니다. 즉, 일을 열심히 할수록 차가 더 빨리 달려 다른 경쟁자를 앞지르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아마존은 이같은 게임화를 통해 노동 비용을 늘리지 않고도 업무를 효율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제, 노동자들은 게임에서 승리하면 보상으로 실제 금전이 아닌 게임 머니를 받게 됩니다. 이 게임 머니는 자신의 가상 캐릭터를 꾸미거나, 고양이·공룡 등 이른바 '펫'을 구매하는 데 쓰입니다.
시범 프로젝트에 참가한 물류센터 근로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포메이션'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미니 게임을 통해 고되고 반복적인 물류 작업 환경을 쾌적하게 개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켄트 홀렌벡 아마존 대변인 또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근로자들은 모두 게임을 즐겼다고 응답했다"며 "게임 참여는 어디까지나 근로자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게임을 하다가 종료하고 일반 업무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선 노동의 게임화가 근로 환경을 더욱 가혹하게 바꿀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게임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업무 진척도는 사실상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수집한 데이터인데, 이같은 게임화가 물류센터·사무실 등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면 '노동자 감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노동자 감시 문제는 이미 여러 기업에서 일상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9월 미국 싱크탱크 '오픈 마켓 인스티튜트'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이커머스 기업들은 물류창고 운영을 효율화할 목적으로 다양한 소프트웨어·센서·스캐너 등을 사내에 은밀히 배치해 노동자들을 감시해 온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를 통해 이들 기업은 노동자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얻고, 더 열심히 일하도록 재촉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같은 문제는 국내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7월 공개한 '폐쇄회로(CC)TV 노동 감시' 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해 접수된 신원 확인 가능한 직장 내 괴롭힘 제보 1588건 중 CCTV 등을 이용한 감시 관련 제보가 181건(11.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강도 높은 근로자 감시로 스트레스 공황장애 등을 겪거나, 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해 방광염에 시달리는 등 심각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전문가는 노동의 전산화·기계화 이전에 근본적인 노동자 건강을 되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는 지난해 7월 시민단체 '참여연대'에 기고한 글에서 "온라인 상거래, 플랫폼 산업, 유통업의 혁신이라는 말 잔치 뒤에 노동이 가려져 있다"며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갈아 넣어지며' 시스템을 굴러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꼬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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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노동의 질을 고려하는 물류산업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높은 이윤을 축적하는 기업들이 이것을 못 할 이유가 없다"라고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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