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현대미술 작가 천제런 개인전
5월2일까지 종로 아트선재센터

천제런의 '상신유신' 전시 중 하나인 '능지: 기록 사진의 전율' 장면.(사진출처:아트선재센터)

천제런의 '상신유신' 전시 중 하나인 '능지: 기록 사진의 전율' 장면.(사진출처: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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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아편에 잔뜩 취해 넋 나간 표정인 한 사내가 손발이 묶인 채 축 처져 있다. 그 앞엔 청나라 관리가 단검 날의 상태를 흡족한 듯 바라본다. 주위 사람들은 겁에 질리거나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둘러서 있다. 화면이 아래로 향하자 묶인 사내의 양쪽 가슴 살점은 전부 도려내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도 사내는 하늘을 쳐다보며 옅은 미소까지 짓는다.


20세기 초 중국에서 실제 있었던 ‘능지형(凌遲刑)’을 대만 현대미술 작가 천제런(61·사진)이 영상으로 만든 ‘능지: 기록사진의 전율’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가 1996년부터 현재까지 작업해온 작품 7개를 소개하는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오는 5월2일까지 열린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14일간의 자가격리를 마쳤다. 무슨 얘기를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걸까.

능지형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폭력성은 강대국과 약소국,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조에서 여전히 목격된다. ‘핵우산’이나 ‘경제 원조’ 따위의 아편을 섭취케 하고 불공정 무역협상으로 약소국의 자원까지 서서히 수탈해가는 행위, 취업을 볼모로 한 불합리한 노동계약 강권 등이 현대판 능지형 아닌가.


주식·비트코인·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자본의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이면에 역대급 실업과 노동자 추락사, 극단적 선택, 영아·아동 살해 등 인간 존엄성이 생선회 뜨듯 잘려 나가는 현실은 20세기 초 능지형장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구경꾼은 더 늘었다. 온라인이라는 거대 콜로세움에 둘러앉은 구경꾼들은 야만성을 문제 삼기보다 사형수나 처형인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따진다.


대만 작가 천제런이 10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 '상신유신' 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출처:연합뉴스)

대만 작가 천제런이 10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 '상신유신' 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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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런도 자국의 이런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자본과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소외를 담고 있다. 대만도 한국과 비슷한 상처를 지녔다.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에서 가장 긴 38년간의 계엄령을 경험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양극화도 심하다. 대만은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적다. 하지만 주택 가격은 홍콩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이에 따른 국내 정치 갈등도 첨예하다.


천제런의 이번 전시명은 ‘상신유신(傷身流身)’이다. ‘상신’은 사회가 남긴 트라우마를 입은 신체, ‘유신’은 이로써 변화한 자신을 의미한다. 흐를 ‘류(流)’는 이런 변화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천제런은 각자 상흔을 드러내 보일 때 비로소 치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제 작품은 비관과 절망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이걸 직시해야 진정한 의미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유신은 변하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천제런의 '상신유신' 전시 중 하나인 '12 연기(緣起)에 대한 노트'의 한 장면.(사진출처:아트선재센터)

천제런의 '상신유신' 전시 중 하나인 '12 연기(緣起)에 대한 노트'의 한 장면.(사진출처:아트선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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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1999~2000년 작업한 ‘12연기(緣起)에 대한 노트’에서는 컴퓨터 선으로 연결된 인간의 신체와 이를 면밀히 관찰하는 감시카메라의 움직임이 상영된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상상한 영화 ‘매트릭스’ 식의 미래 세계다. 컴퓨터와 연결이 단절된 ‘포스트 휴먼’은 현실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깊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다. 작가는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 인간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새겨질지 모른다고 우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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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런은 인류가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 어렵게 전시를 연 것도 이런 간절함 때문이리라. "인터넷 시대에 인간은 기업에 정보를 제공해주는 하나의 데이터가 돼버렸습니다. 이번 전시에도 이 같은 상징성을 많이 담았습니다. 더 이상 정보 독점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의 민중화와 공공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하나의 운동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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