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그리고 20학번 이서연]<上>우리는 젠더리스를 꿈꾼다

[신년기획]"여자라는 꼬리표, 떼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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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밀레니얼세대의 첫 주자인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사회에 잔존하던 성차별 담론을 이끌어냈다. 밀레니얼세대 여성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어머니 세대부터 이어져온 내면화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를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90년대생의 사회 진출로 세대론이 부상하면서 '세대 간 공존'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가 됐다. 밀레니얼세대의 끝자락인 20대, 그중에서도 여성은 저성장에 따른 취업난과 성차별의 장벽까지 마주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이들 20대 여성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다져놓을 태세다. 아시아경제는 20학번 이서연을 통해 20대 여성을 조명하고 성별을 넘어 전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한다. 20학번 이서연은 82년생 김지영이 1980년대 출생한 여아 중 두 번째로 흔한 이름이라는 점에 착안, 2000년대 출생아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여아 이름으로 정했다.


20학번 이서연의 꿈은 크지 않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20학번 이서연의 꿈은 크지 않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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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니까 더 위험하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조심하며 살아와
성희롱ㆍ외모평가 등 토로하면 "그런 곳에 간 너 잘못이다" "너 페미지?"라는 말로 돌아와
기업의 남성채용 선호 여전… 결혼ㆍ출산 거부 20대 늘어나

"다시 태어나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지난해 대학교에 입학한 20학번 이서연(19)은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이씨는 자라면서 "여자니까"라는 말을 지겹게 들었다. 부모님은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편이지만 한 살 터울의 오빠와 달리 이씨에게는 외박과 늦은 밤 통행을 금지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여러 차례 의견을 냈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여자니까 더 위험하다"였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출소한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와 나이가 같다. 수년 전 노래방 건물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나.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실제 이씨도 상가 등 공중화장실에 갈 때마다 혹시 카메라가 숨겨져 있는지 구석구석 살피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여자니까'에 갇혀온 이서연의 20년

고등학교 시절에는 또래 남학생이 여학생 50여명의 사진을 나체 사진 등으로 합성한 이른바 '딥페이크 범죄' 피해도 당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스스로 올린 사진이 아닌 학교 홈페이지에 게재된 사진이었다. 학교 마크가 부착된 교복을 입은 사진으로 명찰과 얼굴까지 공개된 탓에 피해 여학생들은 집단으로 경찰서를 찾아갔다. 하지만 "합성 사진의 수위가 낮다"는 이유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남성 동기들과 선배들의 외모 평가가 이어졌다. "여자애가 왜 수염이 있느냐" "다리가 굵다" "살 안 빼냐" 등의 지적을 서슴지 않았다. 성차별과 고정된 성역할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면 "너 페미(페미니스트ㆍ여성주의자)지?"라는 대응이 돌아왔다.

이 땅에 깊게 뿌리 내린 성차별은 여전했다. 아시아경제가 20대 여성 10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오히려 묻지 마 식 '여성혐오 범죄'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은 커졌고, 사회구조적인 성차별을 목격했다고 입을 모았다. 차별과 불평등으로 점철된 20대를 보내고 있는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확연하다.


"남자가 스펙이다"…남성 디폴트(기본값) 문화

지난해 중견기업에 입사한 20대 후반의 이서연(27)은 대학 졸업 후 1년간 1000여건의 이력서를 낸 끝에 취업에 성공했다. 15번의 면접에서 느낀 것은 '남자가 스펙'이라는 점이었다. 현재 직장의 경우 면접장에서 만난 지원자의 80%가 남성이었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취업준비생 시절 남녀 절반으로 구성된 스터디그룹 내 여성 지원자들은 최종 면접에서 모두 떨어진 반면 남성 지원자들은 전원 합격한 적도 있다. 우연인지 차별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신규 채용에서 명문화하지 않았지만 관행적ㆍ암묵적으로 남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며 "젠더 불평등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하는 여러 가정과 전제 때문에 실질적으로 여성들이 차별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성차별을 받는 큰 이유가 남성은 돌봄(육아)의 책임이 없는 좋은 노동자라는 인식인 남성 디폴트 문화라는 것이다.


남성 디폴트는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노동시장에서 더욱 공고하게 작동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통계청 자료를 바탕으로 15세 이상 인구를 분석한 지난해 9월 여성고용 동향에 따르면 여성 취업자 수는 1158만2000명으로 전년 대비(1186만5000명) 대비 2.4%(28만3000명) 줄었다. 남성 취업자 수가 같은 기간 1553만9000명에서 1543만명으로 0.7%(10만9000명)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감소 폭의 차이가 3배를 뛰어넘는다. 특히 15~29세 여성 실업률은 7.5%로 15세 이상 여성 실업률(3.4%)의 두 배를 웃돌았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폭력ㆍ안전연구센터 연구원은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단계부터 작용하면서 남녀가 동일한 교육 수준과 자격, 스킬 등을 갖춰도 성불평등이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 딸에게 위험한 세상…결혼 거부 선언

20대 이서연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성폭력과 성차별을 경험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간 찜질방에서 오락기게임기에 동전을 넣어주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마음에 든다'라고 적힌 쪽지를 건넸다. 입사 후 회식에선 홍일점인 이씨에게 "서연씨가 있어서 분위기가 산다"고 느물거렸고 "술을 너무 잘 따른다" "술은 어디서 배웠느냐" "남자친구 있나요" "결혼했느냐"는 질문을 쏟아냈다. 밤늦게 탑승한 택시에서 기사는 남자친구와의 성관계 여부를 물어봤다. 택시에서 내릴 땐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에 두고두고 소름이 끼쳤다. 직장 주변 문구점의 중년 사장은 스타킹과 팬티라이너를 선물로 줬다. 지인들에게 토로했지만 "그런 곳에 간 너의 잘못이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게 왜 노출이 많은 옷을 입었냐고 지적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씨는 "집에 혼자 있을 땐 창문과 도어록을 확실히 걸어놔도 무섭다"고 했다.


계약 기간이 만료돼 이사를 앞둔 이씨는 옆집에 남성이 사는지, 창밖에서 집 안이 보이지 않는지 등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해코지를 당한 경험은 없지만 끊임없는 성범죄 사건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성폭력(강간 포함) 형법 범죄율은 인구 10만명당 62.2건으로 82년생 김지영이 발간된 2016년(57.3건)에 비해 높아졌다. 여전히 여성을 성적대상화한 범죄가 실체적 위협인 셈이다. 20학번 이씨는 "2001년생은 조두순 피해자와 나이가 같아 성범죄가 남 일 같지 않다"며 "악질 성폭행범이 사회로 멀쩡히 나오는 걸 보면 한국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너무 관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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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이서연들이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과 일상적인 성범죄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은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인터뷰에 응답한 이서연 대부분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다. 전업주부나 워킹맘 모두 출산과 육아로 자신의 삶 일부를 포기한 모습이 안쓰럽다는 것이다. 20대 후반 이서연씨는 "결혼이란 제도의 불평등도 싫다"며 "출산과 육아는 모성이란 이름으로 여성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고 지적했다. 배 교수는 "자녀 돌봄의 1차적인 책임은 여성에게 있고 아직 돌봄에 대한 남성의 책임은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다"면서 "여성들의 돌봄 책임은 직장 내 승진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만큼 자신의 경력을 소중하게 여기는 여성일수록 결혼을 하지 않는다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다거나 하는 방식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간접 차별을 받지 않으려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이준형 기자 gil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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