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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tage] 핫팬츠+망사 스타킹의 '에이버리'에서 하얀 수녀복의 '아그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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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신의 아그네서'에서 '아그네스' 役 배우 이지혜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가죽재킷, 핫팬츠, 망사 스타킹 차림으로 거침없이 소극장 무대를 누비던 여배우는 강한 잔상을 남겼다. 6개월 뒤 그 배우는 새하얀 수녀복을 입고 대극장인 예술의극장 CJ토월극장 무대에 섰다. '신의 아그네스'에서 '아그네스'로 출연하고 있는 배우 이지혜.


이지혜는 지난 5월 서울연극제에서 '환희, 물집, 화상'에 출연했다. 거침없는 삶을 사는 20대 베이비시터 '에이버리'를 연기했다. '환희, 물집, 화상'은 대학원 룸메이트였지만 가정과 일로 각자 다른 삶을 선택한 두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두 중년 여성은 서로를 부러워한다. 자신과 다른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두 중년 여성이 반듯한 삶을 살았다면 에이버리는 세상의 단맛, 쓴맛을 이미 맛본듯한 인물. 에이버리는 어린 나이에도 두 중년 여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언해주는 인물이었다. 이지혜는 껌 좀 씹어본 언니처럼 멋지게 연기했다. 결과는 서울연극제 연기상.

확 달라진 복장만큼 에이버리와 아그네스는 전혀 다른 삶을 산 인물이다. 최근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만난 이지혜는 "에이버리와 아그네스가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이어서 연기하는 재미가 있다. 저와 달리 극단적인 면이 있어 연기하는데 쾌감이 있다"고 했다. 전혀 다른 삶을 산 둘의 공통점은 나이 정도다. 이지혜는 "아그네스와 에이버리 모두 21살"이라고 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 공연 장면.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왼쪽)와 리빙스턴 역의 박해미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연극 '신의 아그네스' 공연 장면.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왼쪽)와 리빙스턴 역의 박해미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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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그네스'는 미국 작가 존 필미어가 1979년에 쓴 희곡이다. 필미어는 미국 뉴욕 브라이튼의 한 수녀원 휴지통에서 질식사한 아기와 피를 흘리는 수녀가 발견된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신의 아그네스'를 썼다. 국내에서는 1983년 초연했다. 40년 가까이 공연되며 사랑받는 작품이다.


"인간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고전이 되는 것 같다. 작품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얼마나 맹목적일 수 있고, 나약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너무 잘 담겨있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작품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여성 셋이다. 아기 살해 혐의를 받는 아그네스, 아그네스의 정신 상태를 파악해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 리빙스턴을 도우면서도 아그네스를 보호하는데 최우선을 두는 수녀원 원장 미리엄.

리빙스턴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면서 극은 심리스릴러, 수사극의 형태를 띤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아그네스가 진범인지 여부보다는 숨겨져있던 새로운 진실에 주목하게 된다. 셋은 모두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각자의 아픔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아픔 때문에 영아 살해 사건을 마주하는 각자의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음을 극은 보여준다.


아그네스는 알콜 중독자인 어머니에게서 기형적인 과잉보호와 성적 학대를 받았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 했다. 엄마로부터 가스라이팅(Gaslighting) 피해를 입었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하고 타인에 대한 통제력이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가스라이팅은 주로 긴밀한 관계에서 세뇌를 통해 일어난다.


"아그네스는 집 안에서만 자랐고 TV나 책, 학교를 경험하지 않은 아이다. 아그네스의 삶은 엄마와 절대적으로 많이 연결돼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웃어주면 너무 좋고, 엄마가 찡그리면 싫고. 엄마에 대한 마음은 복잡했을 것 같다.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적대감도 있으면서 굉장히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무서우면서 동시에 사랑도 느끼지 않았을까."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세 배우. 왼쪽부터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 리빙스턴 역의 박해미, 미리엄 역의 이수미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세 배우. 왼쪽부터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 리빙스턴 역의 박해미, 미리엄 역의 이수미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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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가 수녀원에 들어온 때는 4년 전이다. 17살 때 엄마가 죽은 뒤였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집 안에서만, 엄마가 죽은 뒤에는 수녀원에서만 지냈다. 사회와 유리된 삶. 그래서 이지혜는 "아그네스는 언어가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종교에 대한 것 외에는 언어가 없는 것 같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벌로 표현된다. 조금 더 세상을 겪거나 경험을 한 친구라면 다른 말로 얘기를 할 수 있을텐데 하느님의 사랑과 벌이 표현하는 것의 전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게 일종의 집착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엄마에게 학대받았던 경험들이 있지만 아그네스가 '학대'라는 말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학대'라는 개념을 아마 모를 것 같다. 어쨋든 인간이기 때문에 좋고 싫은 것, 무섭고 아픈 것을 느낄텐데, 가스라이팅 피해 때문에 내가 나쁜 아이라서 벌을 받는구나. 난 벌을 받아야 돼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지혜가 아그네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미리엄 원장처럼 연민에 가깝다.


"아기 아빠가 누구인지도 밝히고 싶고, 더 넓은 세상과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 그건 이지혜의 마음이다. 아그네스는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연기하는 것이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한데 그런 마음으로는 아그네스를 연기할 수 없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공연 장면. 미리엄 역의 이수미(왼쪽)와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공연 장면. 미리엄 역의 이수미(왼쪽)와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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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아그네스는 수녀원에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갇혀있고 세상을 못 보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아그네스 입장에서는 세상을 볼 필요도 못 느꼈을 것이고 수녀원에서 매일 기도하고 수녀님들과 지내고 신앙에 대해 얘기하고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그런 것들이 정말 행복했을 것 같다. 아그네스의 대사 중 수녀원에 있으면서 '잠도 잘 오고'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 대사가 너무 좋으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아그네스를 비롯해 리빙스턴 박사, 미리엄 원장 수녀의 아픔은 극 중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간의 대화와 독백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특별한 무대 효과도 없이 두 시간 동안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관객들은 자칫 집중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놓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특히 집중해야 한다. 배우들도 마찬가지. 특히 리빙스턴 박사는 두 시간 공연 동안 퇴장 없이 계속 무대 위에 있다. 아그네스와 미리엄 원장이 반복적으로 등·퇴장하며 리빙스턴 박사와 대화를 나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려면 매 순간 집중해야 한다. 대사량도 굉장히 많고 작품의 이야기 때문인지 오래 공연된 작품이라는 역사 때문인지 중압감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공연은 29일까지.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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