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큰 전쟁이 날 때만 징병제를 제한적으로 실시하던 미국에서도 병역에 대한 불평등 논란에 민심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역사는 존재한다. 흔히 '드래프트 폭동'이라고 불리는 1863년 7월 발생한 뉴욕시 징병거부 폭동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남북전쟁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아일랜드계 백인들이 징병제도의 불평등에 항거해 일으킨 대규모 시위에서 비롯됐다.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미 행정부는 남북전쟁에서 병력 소모가 많아지자 징병제도를 실시했다. 20세부터 45세까지 미국 내 모든 남성은 징병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1인당 300달러를 내면 징집을 면제해주는 병역면제제도 역시 함께 실시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중산층 평균 소득은 월 200달러 정도로, 300달러는 하층민들에게 마련하기 쉽지 않은 큰돈이었다. 미 하원에서도 지나치게 불평등한 제도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전쟁 예산 마련이 다급해지면서 징병제와 함께 통과되고 말았다.
300달러가 큰 부담이 되지 않는 부자들은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 당시 징집 대상에 이름이 오른 앤드루 카네기나 JP 모건 같은 재벌들은 물론 훗날 미국 32번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버지인 제임스 루스벨트 등 정치권 유명 인사들도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돈이 없는 하층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끌려가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폭발한 것은 1863년 7월12일 게티즈버그 전투 전사자 명단이 발표된 직후였다. 남북전쟁 전투 중 가장 참혹하다고 알려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는 3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이 아일랜드계 사람이었다.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뉴욕시에서는 그다음 날 추가 징병 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역시나 대다수가 아일랜드계 빈민층이었다.
여기에 분노한 뉴욕시의 아일랜드계 주민 5만여명은 대대적인 시위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나흘간 뉴욕에서 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폭동은 게티즈버그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뉴욕연대 병사들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됐다. 이 폭동을 거치고 나서야 미국 정부와 상류층은 빈민층을 위한 대리 모병인 고용제를 신설하고 자금 모집에 나섰다. 뉴욕 월가의 투자은행(IB)들도 연방군 조직을 위한 재정 문제에 나서겠다며 자금을 내놓으면서 불평등 논란은 겨우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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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5년 동안의 징병제도 큰 논란을 낳았는데, 1000년 넘게 징병제가 지속된 한국 사회에서는 병역 불평등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관행이라는 이름 속에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권력층 자제들의 이른바 '황제복무' 사례가 나올 때마다 민심이 동요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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