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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시각]이정옥 여가부 장관의 정신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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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몇해 전 만난 한 중견기업 여성임원은 신입사원 시절 커피 심부름이 가장 고역이었다고 회고했다. 함께 입사한 남자 동기를 제치고 한동안 부서 내 커피 심부름을 도맡으면서 큰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중엔 선배들이 커피 심부름을 시키기 전에 커피를 상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커피 심부름이 허드렛일이라고 속상해하기보다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여기는 편이 모욕감이 덜했다는 것이다. 남성일색 업계에서 첫 여성임원 타이틀을 거머쥔 그가 유리천장을 뚫은 비결이 '정신승리'라니 인터뷰 내내 씁쓸했다.


성평등 감수성이 높아진 요즘에는 여직원이라고 대놓고 성차별을 일삼는 상사는 드물다. 하지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성희롱 사례는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여직원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노골적인 성희롱은 아니지만, 외모 평가나 직위를 이용해 원치 않는 교제를 강요하는 등 미묘하게 성적 굴욕감을 유발하는 행위들이다. 문제는 '신체접촉이 없다'면 성희롱이 아니라고 여기는 조직 문화다. 혹여 신체접촉이 있더라도 상호간 호감일수 있다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한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의 최근 발언은 우리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 장관은 지난 3일 국회 상위임에 출석해 '고 박 전 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권력형 성범죄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죄명을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답변의 저변에는 여당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성추행 의혹이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여가부가 2018년 펴낸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메뉴얼'을 보면 성희롱 성립 요건으로 "일반적인 사람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음이 인정돼야 한다"라는 대법원의 '합리적인 피해자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오 전 시장은 부산시 여직원의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직전 자진사퇴하며 성추행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 박 전 시장은 피해자의 성추행 신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하 직원의 미투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서는 없었다. 두 사건 모두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인 만큼 피고소인들이 성추행이 없었다면 자리를 지키고 적극적인 반론을 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점에서 여가부 장관이 '경찰 수사'를 핑계로 사회적 파장이 큰 성희롱 사건에 대해 답변을 피한 것은 자격을 의심받기 충분하다. 여가부는 공공기관의 성희롱을 관리감독하는 주무관청이다. 여가부의 성희롱 메뉴얼에 따르면 성폭력과 성희롱은 판단 기준과 처리 내용이 다르다. 같은 행위가 사법적으로 무죄라고 해도 조직에서는 그 행위에 대해 성희롱으로 징계를 할 수 있다. 또 '피해자에 대한 험담' 등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잡은 개념뿐 아니라 행위자를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행위나 행위자를 옹호하거나 두둔하는 행위까지 '2차 가해'라고 내용도 메뉴얼에 담겼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피해자를 우선 보호할 주무부처가 오히려 형사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워 고 박 전 시장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2차 가해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여가부는 고 박 전 시장 사망 직후 장기간 침묵했고, 서울시는 물론 여권에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르는데도 이를 방치했다. 그런데도 이 장관은 국회 답변에서 "성차별ㆍ성폭력 문제 책임있게 대응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 장관도 여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승리'로 버티는 것일까?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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